닫아도 닫히지 않는 문/ 언제나 반쯤 열려
툇마루 밥상 보이는 문/ 보리밥에 열무비비는 소리
할아버지 기침소리/ 객지 나간 아들 기다리는
울타리 안 어머니의 긴긴 밤이 보이는 문
- 김광인, '사립문' -
객지 나간 아들이 행여 올세라 사립문 너머 길게 난 굽잇길을 바라다보고 계실 늙으신 어머니가 한 폭 풍경화 같습니다. 사립문 너머 툇마루에 차려진 열무김치 한 그릇과 보리밥상에 놓인 수저까지 헤아릴 수 있는 옛 시골집은 이제 우리 가까이에 없습니다. 대신 비밀번호를 모르는 사람은 얼씬하지 못하는 육중한 대문이 있을 뿐입니다. 예전 시골집에서 만나던 사립문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뭇가지를 베어다 대충 엮어서 세운 문으로 사립, 사립짝문, 시문(柴門), 시비(柴扉)라고 불렀습니다. 문이라 하기도 어정쩡합니다. 그저 안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표시에 불과한 정도로 도둑을 막거나 남을 겨예한다는 뜻은 애초에 없는 문이 사립문입니다.
사립문은 안과 바깥 세계의 경계가 불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사립문 너머 집 마루와 안방까지도 다 들여다볼 수 있지요. 또 사립문은 헤어짐과 만남의 경계선으로 보내는 자와 떠나는 자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눈물을 서로 씻어주고 닦아줄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그는 금방이라도 그의 집에서도 통곡소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아 괜히 마음이 바짝 죄어들어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기가 두려웠다." 문순태 작가는 <타오르는 강>에서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가기가 두렵다고 했습니다. 밀치고 들어가면 그만인 게 문이지만 철대문과 달리 사립문은 또 다른 정서를 느끼게 해주는 정겨운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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