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踏雪野中去 눈을 밟고 들길을 가면 不須胡亂行 모름지기 아무렇게나 걷지를 말자 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밟고 간 이 발자국이 遂作後人程 뒷사람이 밟고 갈 길이 될 테니
이는 서산대사가 지은 시로 그의 철학이 오롯이 배어 있는 느낌입니다.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에는 임진왜란 때 승군(僧軍)으로 나선 서산대사를 승군 대장 도총섭(都總攝)으로 임명한 교지와 정조임금이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을 친히 적은 “서산대사화상당명의 유물(보물 제1357호)”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고 재상 이정귀(李廷龜)ㆍ장유(張維)가 지은 비문에 가운데 휴정(休靜, 서산대사)의 사적이 실려 있는 내용을 보면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선묘(宣廟, 선조)께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으로 삼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때 내리신 선묘의 전교(임금이 내린 명령)와 의발(衣鉢, 가사와 그릇)이 호남 대둔산(大芚山)에 간직되어 있으니, 영남의 예에 따라 사당 세우는 것을 허락하고 이어 표충(表忠)이란 두 글자의 편액(扁額)을 내리는 것이 조정에서 포장(褒奬,칭찬하고 장려함)하는 뜻에 부합됩니다." 이는 호조 판서 서유린이 올린 상서로 《정조실록》 1788년 7월 5일 기록입니다.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특명을 받아 팔도도총섭이 되어 73살의 나이로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군 1,500명을 모아 왜군을 무찌른 분입니다. 이러한 서산대사의 공훈은 200년이 지난 정조임금 때 해남 대흥사에 영정이 모셔지게 되고 정조임금이 친필로 “서산대사화상당명”과 그 서문을 써서 대흥사에 내려 보내게 되지요. 이 서문에는 꽃, 구름무늬 채화가 그려진 담황색 비단에 내용이 적혀있고, 끝부분에는 정조의 친필임을 상징하는 '홍재(弘齋)'라는 도장이 찍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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