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하루하루가 잔치로세(김영조)

2월 29일 -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여사를 기억합니다

튼씩이 2018. 2. 28. 10:40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 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일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자존을 위하여 싸우다 옥고로 순국한 남자현(南慈賢 1872. 12. 7. ~ 1933. 8. 22.) 여사의 유언입니다. 여사는 효부, 열녀, 열사로 불리며 지조와 도덕 ․ 예지가 만인의 귀감이 될 만한 독립군의 어머니지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933년 2월 29일 오늘은 여사가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주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무등신의(武藤信義)를 제거하려다가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혀 투옥된 날입니다.



1872년 12월 7일 경북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南珽漢)의 3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여사는 19세 때 김영주(金永周)에게 시집가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나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다시 보자”면서 결사보국(決死報國)을 결심하고 의병운동에 뛰어든 남편 김 씨가 왜군과 전투 중 전사하게 되면서 운명이 바뀝니다.



남편의 전사소식을 듣고 복수심에 불탔지만 3대 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부모 봉양을 위해, 바로 나서지는 못합니다. 양잠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가던 중 여사의 나이 47살 때 3․1운동이 일어납니다. 이에 3월 9일에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通化縣)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에 가입,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시작하지요.



1925년에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죽이려고 국내에 잠입한 바 있으며, 투옥 중인 안창호, 김동삼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를 옥바라지 했고 항일운동하면서 병들고 상처받아 고생하는 애국청년들에게 항상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손길로 간호하며 위로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침략진상을 파악하려고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고자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 천에다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하여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킨 일화도 있습니다. 남자들도 행동에 옮기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옥중에서 여사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으로 버티다 후유증으로 1933년 8월 22일 향년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높은 기개는 영원히 새겨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