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촌 이암 자화상
행촌공(杏村公) 이암(李巖, 1297~1364) 선생은 고성 이씨 9세로 고려 말 충신입니다. 고려 최고의 명필이요, 공민왕 때 수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을 지냈고, 서북면병마도원수(요즘의 참모총장)로 홍건적 4만 명을 물리친 대단한 인물이지요. 하지만 이암 선생은 행촌3서, 곧 역사서인 ≪단군세기≫, 도학심법서인 ≪태백진훈≫, 경세실무서인 ≪농상집요≫를 펴낸 대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암 선생의 친필을 우리나라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일제가 모조리 빼앗아 가 현재 야마구치여자대학 도서관에 ‘데라우치문고’로 보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문수 선생이 찾아낸 이 책에는 “고려국 문하시중 분정 행촌 이암 공의 친필진본”이라는 확인과 함께 영인하였다는 도서관의 관인이 찍혀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일제가 ≪단군세기≫를 우리 겨레의 자존심으로 생각하여 감추고, 대신 식민사관을 심으려고 한 짓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이암 선생의 후손으로 고성 이씨 30세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이 있습니다. 석주 선생은 일제강점기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대통령)을 지낸 분으로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고 유언했을 만큼 평생을 독립운동으로 보낸 분입니다. 퇴계학에 밝았으며 을미의병 때부터 참여하여 무너진 나라를 일으키려고 온 정성을 쏟았으나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99칸의 집과 논밭을 팔아 친인척 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갑니다. 거기서 최초의 해외 독립운동단체인 경학사를 만들고 무장투쟁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지요. 조국광복을 위해 온몸을 불사른 설주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은 행촌 이암 선생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단군세기≫와 같은 민족 역사서를 위서라고 부정해왔는데 이제라도 행촌 선생의 업적은 재조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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