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하루하루가 잔치로세(김영조)

4월 30일- 선조를 살리려고 불타야 했던 화석정

튼씩이 2018. 4. 30. 10:10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처량한 울음소리 저녁구름 속에 그치네


경기도 파주 화석정에 걸린, 율곡 이이가 여덟 살 때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입니다. 화석정은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 잡은 경치가 빼어난 곳이지만 최근에 이 앞쪽으로 새로이 길이 생겨 예전의 빼어난 절경은 구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곡 이이가 즐겨 찾던 발자취를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요즈음도 많습니다.


유서 깊은 이곳은 선조와 관련이 있는데, 선조는 율곡 이이처럼 자연경치를 벗하며 여생을 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왜놈들을 피해 피신하다 1592년 오늘 바로 이곳에 다다르지요. 선조는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이이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궁궐을 빼앗기고 의주 땅으로 피난길에 이르러 화석정에 다다릅니다. 앞에는 천길 벼랑 물길에 막히고 뒤로는 왜군에 쫓기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신하들은 화석정을 불태워 임금이 무사히 임진강을 건너도록 하지요. 선조 임금이 좀 더 왜적을 대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 뒤 덩그마니 빈터로 남아 있던 화석정은 80여 년이 지난 1673년(현종 14)에 율곡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 이후방(李厚坊)이 한차례 복원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타버리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현재의 모습은 1966년 파주시 유림들이 복원한 것을 1973년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 유적지 정화사업의 하나로 정부가 재정비한 것입니다.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는,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평천장(平泉莊)의 기문(記文)에 보이는 ‘花石’을 따서 이름으로 삼았다는 화석정은 선조의 피난용 불쏘시개로 쓰였으니 아픈 기억일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