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일본국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24살 청년 윤봉길의 거사를 두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는 이렇게 격찬한 바 있습니다. 조선 청년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일제의 식민정책을 온몸으로 저항한 영원한 청년 윤봉길! 그는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오사카 형무소에 수감된 뒤 1932년 12월 19일 총살형을 당합니다. 12월 19일은 윤봉길이 왜놈 땅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날이지만 그의 나라사랑 정신은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영혼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으니 결코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은 것이었지요.
윤봉길은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3.1운동 뒤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한학을 배운 뒤 농민계몽을 위해 <농민독본>을 쓰고 야학을 조직하여 농촌의 어려운 청소년을 가르쳤습니다. 또 짧은 생애 가운데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부흥원(復興院) 따위의 농민단체를 만들어, 몸이 건강해야 농촌이 발전하고 민족독립 정신을 기를 수 있다는 신념으로 농민들의 건강증진 활동에도 관심을 쏟았습니다.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충남 예산 고향을 떠난 것은 그의 나이 22살 때인 1930년 3월 6일. 그는 3.1운동 뒤 독립운동의 거점이 중국으로 옮겨지면서 항일운동이 중국, 만주에서 진행되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무엇인가 큰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대륙을 향해 떠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와 함께 거사를 구상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실천에 옮기게 된 것이지요. 1932년 4월 29일은 조선청년의 기개와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린 청년 윤봉길의 거사 날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지난 게시판 > 하루하루가 잔치로세(김영조)'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월 1일 - 효 되새기기 하나, 소문난 효자 영조 (0) | 2018.05.02 |
---|---|
4월 30일- 선조를 살리려고 불타야 했던 화석정 (0) | 2018.04.30 |
4월 28일 - 이순신 장군의 생일을 아시나요 (0) | 2018.04.28 |
4월 27일 - 비운의 장군, 탄금대에 뛰어내리다 (0) | 2018.04.27 |
4월 26일 - 보릿고개는 넘기 힘든 고개지요 (0) | 2018.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