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小山蔽大山)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遠近地不同)
다산이 일곱 살 때 지은 시입니다. 10살 때에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배운 뒤 지은 글이 자기 키만큼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니, 어린 시절부터 글공부에 열심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지요. 10살 이전의 작품으로 <삼미자집>이 있다고 하나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다산은 영조 38년(1762) 6월 16일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4남 1녀 가운에 4남으로, 어머니는 조선 시대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였습니다. 흔히 알려진 약용(若鏞)은 관명(冠名)이며 자는 미용(美鏞), 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다산(茶山)으로 전합니다. 다산이란 이름은 사도세자의 변고로 시파에 가담하였다가 벼슬을 잃은 아버지 정재원이 귀향할 때 출생하였기 때문에 지은 이름입니다. 다산은 두 살 무렵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 위에 자국이 세 개 남아 스스로 호를 삼미자(三眉子)라고 했습니다.
다산은 정조가 죽자 정적들의 모함으로 사지에 내몰리는데 겨우 목숨을 건져 40살부터 18년간 긴 유배생활에 들어갑니다. 이때 자신의 운명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시대의 아픔을 학문적 업적으로 승화하였습니다. 경학과 경세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연구에 힘써 500권이 넘는 책을 썼습니다. 그의 글쓰기는 당시 조선 사회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고 백성을 살리기 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요.
42살 때 유배지에서 맞은 동짓날, 자신이 묵던 작은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는데 ‘생각을 담백하게 하고, 외모를 장엄하게 하고, 언어를 과묵하게 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방 이름 하나에서도 그의 인품이 엿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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