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군산은 <삼국사기> 지리지 백제조에 복홀군, 파부리군, 동로현, 분차군과 함께 소개되는 마사랑현으로 역사가 오래된 곳입니다. 그러나 군산이 근세에 널리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였습니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쌀이 모이는 집결지로서 쌀 도시 군산의 이미지는 1925년에 일제가 출간한 <군산개항사> 내용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세관 옥상에도, 부두에도, 길에도 눈길 가는 곳마다 곳곳에 수백 가마씩 쌓여 20만 쌀가마니가 정렬하였으니…… 오호 장하다! 군산의 쌀이여!”
1899년 5월 1일 군산항의 개항은 이후 줄곧 일본에 ‘조선 쌀 송출항’으로 쓰였는데 1921년부터는 거의 매일 일본으로 조선 쌀이 보내지고 있었습니다. 1921년 3월 22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현미 4만 6,141석, 정미 1만 8,209석을 오사카, 나고야, 고치현 따위로 실어 나갔으며 이는 군산항 개항 이래 신기록이라는 기사가 보입니다. 이렇게 신기록을 세울 만큼 많은 쌀을 실어 가버리고 나니 정작 조선인들의 식량사정은 나빠질밖에요. <조선중앙일보> 1935년 1월 21에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 복어알 먹고 생명중독>이라는 기사가 눈에 뜁니다.
초근목피도 어렵다는 아우성이 일자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산계획을 세우는데 이 역시 조선을 위한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1934년에는 그 해 생산된 1,672만 석 가운데 60%에 해당하는 891만 석이 일본으로 보내졌으니까요. 그 중 전라도에서 생산된 300만 석 이상이 군산을 통해 일본으로 송출되어 일본인의 배를 불렸습니다. 기름진 조선 쌀을 실어나르던 군산의 경기가 얼마나 좋았으면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도 전인 1907년에 이미 군산에는 일본인이 2,956명으로 한국인 2,903명보다 53명이나 더 많이 살았습니다.
이도 모자라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6월 17일에는 미곡강제공출제를 실시합니다. 두 달 후로 다가온 패전의 그림자가 길게 비추던 무렵 일제는 조선의 집 안에 쌀 한 톨을 남기지 않는 강제쌀공출제를 강행한 것입니다. 입만 열면 일제강점 역사를 ‘조선인을 잘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일본의 가증스러움은 인간생존의 최후수단인 쌀 수탈 하나만으로도 그 악랄성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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