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는 겨울철 한강의 얼음을 떠서 동빙고와 서빙고에 보관했습니다. 동빙고는 한강변 두뭇개, 곧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고, 서빙고는 지금의 서빙고동 둔지산(屯智山, 용산 미군기지 안) 기슭에 있었지요. 이에 대한 내용은 19세기 서울의 관청, 궁궐 풍속 등을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의 궐외각사(闕外各司) 조항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얼음은 네 치(한 치는 약 3.03cm로 12cm가량) 이상 얼면 뜨기 시작했지요. 얼음을 뜨고 저장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얼음을 뜰 때에는 칡으로 꼰 새끼줄을 얼음 위에 깔아놓아 사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또 《세종실록》에는 장빙군(藏氷裙, 석빙고에 얼음을 저장하는 군인)에게 술 830병, 생선 1,650마리를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얼음을 저장하는 사람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얼음을 만들어 보관하고 운반하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들었지요.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 ‘천관 이조(天官吏曹)’에서 말하길 “생각건대, 동빙고는 두모포에 있고, 서빙고는 한강가에 있다. 무릇 빙고에 재물이 소비되는 것은 모두 얼음을 뜨고 얼음을 실어 나르는 데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나는 궁궐 안에 찬 샘물이 있으니 응달진 곳에다 큰 움을 파서 사방을 돌로 쌓고 틈을 회로 바르고, 대한(大寒) 열흘 후쯤에 수일 동안 몹시 추운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므로 그때를 타서, 얼음 뜨는 사람에게 샘물을 길어다가 움 안에다 쏟아 넣도록 한다. 물을 한 동이 부으면 한 동이가 얼고, 물을 두 동이 쏟으면 두 동이가 얼어서, 잠깐 동안에 한 움이 온통 얼음으로 될 것이다. 이 얼음은 그 벽에 틈이 없으므로 외풍이 사이에 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봄, 여름에 날씨가 따뜻해져도 녹지 않으며 얼음도 극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행되었다는 기록은 안 보입니다. 다만 동빙고의 얼음은 주로 제사용으로 쓰고, 서빙고의 얼음은 임금의 친척과 높은 벼슬아치들에게도 주었지만 활인서의 병자 그리고 의금부 죄수들에게까지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이 조선 시대 최대의 얼음 창고였음을 알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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