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1851∼1895)는 고종의 비로 왕비간택 이전인 소녀 시절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틈틈이 《춘추(春秋)》를 읽을 정도로 총명했으며, 수완이 남달랐다고 전하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의 정치적 대립이 커 훗날 이것이 화근이 되는 불행을 겪습니다. 1895년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정책에 정면 대결하는 명성황후와 그 세력을 일소하려고 일본군대와 정치낭인(政治浪人)들을 앞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한 만행인 을미사변을 저지릅니다. 일본인의 손에 이때 무참히 살해된 명성황후는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되었지요.
시해 당시 궁 안의 상황과 흉도들의 행동은 자료와 증언마다 차이가 있습니다만 당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또 흉도들은 궁녀들 사이에 숨었다가 도망치는 명성황후를 쫓아가 마룻바닥에 넘어뜨려 내동댕이친 뒤 구둣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칼로 찔렀다고 하지요. 또한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처참한 상황이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무리는 왕비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를 하였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태우는 등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라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일입니다. 명성황후를 흔히 민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바른 이름이 아닙니다. 일제는 한일 강제병합 이후 순종을 이왕(李王), 고종을 이태왕(李太王)이라고 불렀고, 대한제국의 왕실을 이왕가(李王家), 이왕실(李王室)로, 조선을 이씨조선(李氏朝鮮), 곧 이조(李朝)로 부르면서 조선왕실을 깔보는 태도를 보였고 끝내는 국모를 시해하는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비록 비운에 간 왕비지만 민 씨 또는 민비라 부르는 일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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