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하루하루가 잔치로세(김영조)

11월 11일 - 호박에 서린 열한 살 소년의 그 시절 애환을 풀어봅니다

튼씩이 2018. 11. 11. 12:51

가을철에 시장에서 누렇게 익은 늙은 호박을 보면 고향생각이 납니다. 우리 겨레는 이 늙은 호박으로 여러 가지 음식을 해먹었습니다. 지방마다 다르겠지만 ‘호박수제비’나 ‘호박죽’도 해먹고 충북 영동에서는 ‘호박풀때기’라는 것도 해먹었지요. 음력 섣달 초닷새에 호박풀때기를 해먹으면 다음 해 농사가 잘된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호박떡’, ‘호박범벅’ 같은 것도 호박으로 해먹는 음식들입니다.


 

1927년 10월 <별건곤> 9호의 <농촌실정탐사기>를 보면 호박죽은 쌀 떨어진 집에서 해먹는 식사대용 음식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은평구 녹번동쯤 되는, 당시에는 논과 밭이 있는 곳으로 잡지사 기자 두 명이 탐방길에 오릅니다. 그리고 고즈넉한 농촌으로 들어서면서 마주치는 농부나 우물가의 여자들에게 다가가서 농촌실정을 수소문합니다. 그러다가 손에 좁쌀 한 되를 사가지고 오는 소년과 마주칩니다. 소년은 11살, 김 씨입니다. 기자들은 소년에게 질문을 하지요.

 

기자 : 너 그래! 좁쌀 사러 오는구나. 너의 집에는 조밥만 해 먹늬?

소년 : 쌀은 작년에 떨어지고요 좁쌀만 똑 한 되 씩 팔어 먹다가요 지나간 달부터는 그것도 없서서 玉蜀黍(옥촉서, 옥수수의 중국이름) 좀 심은 것도 다 먹고요. 어적게 밤에 호박죽 좀 먹고는 이때것 굶엇서요.

기자 : 그래! 너의 집에서 농사도 안 짓늬?

소년 : 농사지어요. 회사땅 서마지기 하고요. 조선사람 땅 두마지기 하고래요.

 

기자는 한눈에 봐도 영양이 부실한 소년의 휑뎅그레한 눈망울을 보며 이런저런 집안살림을 물어봅니다만 두 사람의 대화는 더도 덜도 숨길 것 없는 1927년 농촌풍경으로 ‘좁쌀밥도 호박죽도 떨어진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지금은 별미로 먹는 호박풀때기나 호박죽이 그 시절은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요긴한 식량이었다는 걸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