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르 따르릉....1896년 8월(음력) 26일 인천 감옥소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한성-제물포 간 행정전화가 개통된 지 3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날은 백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 시해범인 츠치다를 처단한 죄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시각이었습니다. 이 사형 집행을 연기하게 한 것은 고종황제였는데 이때 전화가 요긴하게 쓰였던 것입니다.
고종황제는 백범의 사형집행 당일에야 그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고 국모 살해범을 처단한 청년 백범은 영락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뻔한 지경에 놓였었으므로 아주 긴박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전화가 가설되지 않았더라면 당시에 상용하던 전보나 사람을 시켜 사형중지를 해야 했으니 하마터면 때를 놓칠 사건이었지요. 이날 고종이 인천감옥소에 직접 전화를 건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시외전화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궁궐과 관청인 아문 사이의 연락용 전화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 청나라에 간 영선사 일행이 2대를 가져온 뒤입니다. 이것은 미국 알렉산더 그레엄 벨이 1876년 전화를 실용화한 지 불과 6년 뒤 일입니다. 나아가 대중용 공중전화기가 개통된 것은 1902년 3월 20일 대한제국통신원이 한성과 인천 사이에 시외전화 한 회선을 개통한 것이 그 시초입니다.
고종은 죽어서 동구릉에 모신 대비 조씨에게 당시 덕률풍이라 불렀던 전화로 아침저녁 문안을 드렸습니다. 전화는 덕률풍(德律風)이란 이름 말고도 득률풍(得律風), 어화통(語話筒)이라고도 불렀다고 하지요. 덕률풍은 ‘'텔레폰'을 한자식(음역)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신하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요상한 기계라며 전화기 사용을 반대했지만 고종은 대신들을 믿지 못해 덕률풍으로 칙교를 내릴 정도였습니다.
이때 덕률풍 칙교를 받을 사람에게 시간을 미리 알려주면 그 시간에 조복을 갖춰 입고 덕률풍에 대고 네 번의 절을 한 다음 엎드려 공손히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어야 합니다. 한편, 백성은 덕률 바람이 가뭄을 가져와 농사를 망친다거나 전화기 속에는 번개귀신이 숨어있다 하여 전화만 왔다 하면 벌벌 떨고 도망가기 바빴다고 하지요. 지금은 국민 대다수가 손말틀(휴대폰)이 있고, 슬기전화(스마트폰)가 보편화하였으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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