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3262. 세종임금, 벼락이 치자 해괴제를 지내고 사면령을 내리다

튼씩이 2016. 4. 8. 19:00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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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4. 8.


2014년 사망원인 통계에서 사고사 가운데 교통사고로 죽은 것은 9위인데 2013년에 견줘 조금 줄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나 기차, 그리고 비행기가 없었던 조선시대에 교통사고는 배가 가라앉아 죽은 것 말고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 조선시대 사고사는 뜻밖에 벼락으로 죽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벼락”으로 검색하면 무려 1,239건이 나오는데 거의가 “아무 데서 아무개가 벼락을 맞았다.”입니다.

재미난 것은 《세종실록》 세종 25년(1443년) 10월 4일 기록으로 전라도 영광 사람 김원기의 아내가 벼락에 기절하였다가 깨어났는데 말뚝에 벼락칼이 박힌 것을 보고 이를 임금께 바쳤다는 내용입니다. 또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년) 3월 13일에는 “삼각산의 소나무와 산기슭에 벼락이 치니, 해괴제(解怪祭, 나라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을 경우에 지내던 제사)를 행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로는 벼락도 이해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어서 두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백성을 끔찍이 사랑했던 세종임금은 벼락에 사면령까지 내리지요. 《세종실록》 세종 26년 7월 11일 기록에는 "내가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려 하나 덕이 부족하고 정치에 잘못이 있어서 백성들의 원망은 일어나고 가뭄이 이어지더니, 이번에는 하늘이 또 경계함을 보이어 영생전에 천둥 벼락을 치니, 내가 매우 두렵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마땅히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여야 할 것이므로, 오는 7월 12일 먼동 틀 무렵부터 그 이전에 지은 죄로서 중대한 죄를 범한 자를 빼고는, 다 용서하여 죄를 면제한다."라고 나옵니다. 세종임금은 벼락에도 스스로를 꾸짖을 줄 아는 으뜸 성군이었습니다.

옛 얼레빗 (2012-02-29)


2261. 마음이 통하는 벗과 함께하는 김홍도의 “백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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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매(一枝梅)는 도둑 가운데 협객이다. 그는 탐관오리들의 뇌물을 훔쳐, 먹고살 길 막막한 사람이거나 죽어 장사지낼 돈조차 없는 백성에게 훔친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 처마와 처마 사이를 나는 듯이 다니고 벽을 붙어다니니 날래기가 귀신같아서 도둑맞은 집에서는 어떤 도둑인지 몰랐다. 그리하여 스스로 붉은색으로 매화 한 가지를 그려 놓았다. 다른 사람이 의심받지 않게 해서였다. 매화 한 가지 증표로 남겨두고 탐관오리 재산으로 가난한 이를 돕는다. 때 만나지 못한 영웅 예부터 있었으니 옛적에도 오강에 비단 돛 떠올랐었다.”

위 글은 조선 후기의 위항시인(중인 이하 계급 출신 시인)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이 쓴 ≪추재기이(秋齊紀異)≫ 일부입니다. 백성에게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던 일지매, 그는 탐관오리 집에서 도둑질을 하고는 늘 매화 한 가지를 그려놓았다고 하지요. 그런 매화는 일지매뿐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선비들이 무척이나 좋아하여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참 많았습니다. 특히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도 매화를 사랑한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조가 죽은 뒤 김홍도는 생계가 무척 어려워졌는데, 이런 와중에 그는 어떤 이가 팔려고 내놓은 매화 화분에 그만 마음을 뺏겨 버렸습니다. 마침 그림 값으로 들어온 3,000냥이 있어 2,000냥으로 매화를 사고, 혼자 보기 아까워 친구를 모아 800냥으로 술자리까지 벌였다고 하지요. 어쩌면 그 매화일지도 모르는 김홍도의 그림 “백매(白梅)”가 간송미술관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마음이 통하는 벗과 함께 술잔을 나누며 바라보고 싶은 소탈하고 정취 어린 그림입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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