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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龍)은 상상의 동물 가운데 하나로 몸은 거대한 뱀과 비슷한데 비늘과 네 개의 발을 가지며 뿔은 사슴에, 귀는 소에 가깝다고 합니다. 또 용은 상서로운 동물로 기린ㆍ봉황ㆍ거북과 함께 사령(四靈)의 하나로 여겨왔습니다. 그 용이 물속에서 읊조리면 어떤 소리가 날까요? 그렇게 용이 물속에 읊조린다는 뜻을 가진 전통음악이 있는데 바로 “수룡음(水龍吟)”이 그것입니다.
《태종실록》 2년(1402년) 6월 5일자에 보면 예조에서 궁중 의례 때 쓰는 음악 10곡을 올리는데 10곡을 고른 까닭을 다음 같이 말합니다. “신 등이 삼가 고전(古典)을 돌아보건대, ‘음(音)을 살펴서 악(樂)을 알고, 악(樂)을 살펴서 정사(政事)를 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악(樂)을 합하여 하늘의 신령과 땅의 신령에 이르게 하며 나라를 화합하게 한다.” 임금도 '악(樂)'을 알아야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열곡 가운데 수룡음이 들어 있습니다.
수룡음은 본래 가곡의 반주음악을 노래 없이 기악으로만 연주하는 음악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자진한잎. 사관풍류라고도 하지요. 가곡의 반주는 원래 대금, 세피리, 해금, 거문고, 가야금,장구 따위로 쓰는데 특히 수룡음은 관악기 가운데서도 생황과 단소의 병주(생소병주)로 즐겨 연주합니다. 수룡음은 생소한 분도 있겠지만 참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나는 음악으로 손말틀(휴대폰) 컬러링 음악으로 쓰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며, 특히 외국인들이 참 좋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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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속풀이 25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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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백영춘의 “배추 사려” 소리, 명창이 따로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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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3월 29일 저녁 정효재단 설립기념으로 백영춘, 최영숙 등이 무대에 올린 개막 공연 이야기를 하였다. 주로 서울지방에서 불리고 있는 아리랑을 비롯한 민요창과 장대장타령이라는 재담소리를 위주로 하였다는 이야기, 스승 이창배 명인의 활동이나 공적으로는 노랫말 속에 나오는 어려운 고사(古事)나, 한문구(漢文句)의 해설, 부정확한 발음이나, 왜곡된 표현, 저속한 내용은 수정하였으며 그래서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전통민요의 교재를 만들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날 개막공연은 박춘재의 재담소리와 이창배의 경서도소리가 중심이었지만, 앞으로 이어지는 4개월간의 공연에는 <회심곡> <탑돌이> 등의 불가(佛歌), 무가(巫歌), 신민요 등, 경서도창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노래를 포함하며 공연과 함께 명창으로부터 소리도 배우고, 대화도 나누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창배 사범과 함께 경서도창 전승에 공이 있는 정득만 명창 과천패 소완준의 제자로 산타령을 이어오는 한편, 시조와 가사, 긴잡가도 잘 불렀으며 박춘재의 사랑방에 드나들며 귀에 익힌 재담소리를 백영춘에게 일러주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현재의 경서도 명창 중에서 이창배, 정득만의 지도를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이며 백영춘도 그 중 한 사람이란 이야기, 백영춘이 있어서 서울의 재담이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으며 그 문하에서 최영숙을 비롯한 경서도 창악회의 여러 전승자들이 모여들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의미 있는 공연이 준비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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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재담소리를 복원하여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백영춘은 어떤 인물인가? 어떤 인연으로 소리꾼이 되었을까?
백영춘은 광복 이듬해 서울 은평구에서 태어났다. 소리꾼들의 대개가 그렇듯이 백영춘도 어려서부터 노래 부르기를 즐겨하였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밭농사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기에 장터에서 무나 배추 또는 파를 단으로 묶어 파는 일을 돕기도 했는데, 배추 단이나 파 단을 셀 때 재미삼아 ‘하나요, 둘’ ‘셋이요 넷’에 가락을 넣어 흥얼거리던 소리가 너무도 구수하고 음악적이어서 주변에 그의 소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의 구수하게 넘기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일부러 무나 배추, 파를 사러 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니 소년명창이 따로 없고 그래서 그의 이름은 시장 내에서 밖으로 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최근에는 무나 배추를 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파는 모습을 좀체 보기 어렵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모습은 장사꾼들의 일상이었다. 한국을 찾은 외국 방문객들이 재미있게 생각하고 녹음한 내용 중에는 가위를 장단에 맞추면서 엿을 파는 엿장수 소리, 또는 목청을 돋우며 사과나 배, 배추나 무를 파는 장사꾼들의 소리 등이 있는데, 처음 듣게 되는 외국인들은 이들의 리드미컬한 소리가 매우 음악적으로 들렸다는 것이다.
기실 한국의 장단(長短)이란 3분식 구조가 일반적이다. 가령 1박자를 2/3와 1/3로 구분하거나 반대로 1/3과 2/3로 조합하여 장단을 칠 때, 장-단, 장-단, 장-단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단조롭기 때문에 재미가 적다. 그래서 장-단, 장-단으로 가다가 중간에서 <단 장->으로 변화를 주어야 재미가 있는 법이다.
이 논리를 배추와 무를 사라고 외칠 경우에 적용해 본다면 배추와 무를 동일한 리듬형으로 종일 반복해서 외친다면 장사꾼이나 듣는 사람들도 단조롭기 마련이어서 듣기 싫을 것이다. 마치 광고를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배추 사려~ , 무 사려~> 로 시작했다면 중간에는 리듬을 바꾸어 <무 사려~ , 배추>라고 변화를 주어야 재미있게 들린다는 말이다.
소년 명창 백영춘이 배추단이나 파단을 세면서 장단에 맞춰 변화를 주었다는 말은 그의 음악적 감각이 얼마나 뛰어났는가 하는 사실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시장에 널리 알려졌고 밖으로 소문이 난 것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미 그는 어릴 때부터 재담소리의 멋을 알고 있었던 예고된 명창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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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그는 음악에 대한 재주도 있었고 열정도 있었으나 정식으로 음악을 배울 형편이 못되었고 고작해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명창들의 민요가락이며 대중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부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학교를 입학하였으나 정작 그의 길은 소리꾼으로 가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경서도 소리에 열중했는가를 알게 하는 대목이 있다.
“제가 작업장에 갈 때면 늘 라디오를 지니고 다녔어요. 거기서 흘러나오는 장학선의 소리며 이정열, 이반도화, 이진홍, 이소향, 유개동과 같은 명창들이 부르는 소리들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따라 불렀지요. 특히 배따라기, 국문뒤풀이, 대감놀이, 선소리산타령과 같은 소리들을 열심히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곤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가 열거한 명창들은 하나같이 유명했던 소리꾼들이었다. 특히 장학선에 대해서는 1920년대 초, 평양을 방문했던 일본의 음악인, 다나베의 ‘대동강주유기(大同江舟遊記)’에도 보인다. 그의 일행이 평양 대동강에서 4인의 기생과 뱃놀이를 하였는데, 그 중에 제일 인상적인 기생이 14~5세의 장학선(張鶴仙)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장학선은 10살 때 평양 관우물 소리방에서 노래를 시작했고 14세 때부터는 평양의 기성권번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김밀화주(金蜜花珠) 명창에게 소리를 배웠다. 그는 1905년생이고, 훗날 월남하여 60년대 말, 중요무형문화재 29호 서도소리의 초대 예능보유자가 되었으며 1970년에 작고한 서도소리의 대명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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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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