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년 전인 1883년(고종 20)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창간된 날입니다. 한성순보는 서울 저동(지금의 을지로2가)의 통리아문(統理衙門) 박문국(博文局)에서 월 3회 발행한 순보(열흘 간격으로 발행)였지요. 1882년 박영효(朴泳孝) 일행이 수신사(조선 말 고종 때 일본에 보내던 사신)의 자격으로 일본에 가 머무르면서 국민대중의 계몽을 위한 신문 발행의 필요성을 깨닫고 신문제작을 위해 기자와 인쇄공 등 몇 명의 일본인을 데리고 돌아온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종은 1883년 8월 17일 통리아문에 박문국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행하도록 허락하게 됩니다. 이때 김인식(金寅植)이 신문 발행 실무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근대적인 신문기자의 전신인 주사(主事)와 사사(司事)를 임명했습니다. 이 신문은 ‘순보서(旬報序)’에서 “우리 조정에서 관청을 만들어 외국신문을 널리 번역하고 아울러 국내의 사건도 실어서 나라 안에 배포할 것”이라고 내세우고, “시세를 살펴 흐르지도 말고 빠지지도 말며 좋고 나쁜 것을 취사선택하여 도리에 맞게 구해서 바른 것(正)을 잃지 않는다면, 박문국을 개설하고 신문을 발간하는 취지를 거의 달성하게 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관영신문의 성격을 지닌 이 신문은 발행 직후 각 관청에 나눠주어 관리들이 읽게 하였으며, 관리말고도 일반인도 구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신문은 1884년 12월 4일 1년 만에 종간되었다가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漢城周報>로 그 제호를 바꾸어 주간신문으로 다시 발행되었지요. 이 신문은 비록 짧은 기간 발행되었으나 우리나라 첫 근대 신문으로서, 외세에 대한 경계의식과 자국에 대한 국민의식을 높이는 한편, 개화문물과 지식 등을 소개하여 나라의 개화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1년 동안에 40여 호가 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로는 창간호에서부터 제36호(1884년 10월 9일자)까지만 서울대학교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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