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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빗) 3297. 호화로운 부채, 조선시대 내내 문제였다

튼씩이 2016. 5. 27. 08:11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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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5. 27.



"단오 때 진상하는 부채는 비단에 주칠(朱漆, 붉은 물감)을 하였는데, 사치스럽기만 하고 실용 가치가 없으니, 지금부터는 양대비전(兩大妃殿)에 바치는 것 외에는 다시 그렇게 하지 말라." 이는 《성종실록》 23년(1492) 3월 23일에 나오는 성종의 어명입니다. 얼마나 부채가 호화로웠으면 임금이 직접 나서서 주칠한 부채를 만들지 말라고 했을까요?

또 《정조실록》 정조 18년(1794) 11월 27일 기록을 보면 암행어사 서유문이 임금에게 고하기를 "흥양현(興陽縣 지금의 고흥)은 과거에는 대나무의 산지로서 해마다 부채 만드는 편죽(片竹)을 1천 5, 6백 자루나 혹은 2천여 자루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중간 줄임) 명색이 첩선(帖煽)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길이가 한 자에 가깝고 그 살도 30개가 넘습니다. 대 하나를 베어 쓸 수 있는 것은 겨우 한두 마디뿐이니 만약 첩선을 만들려면 부채 한 자루에 큰 대 몇 개를 소비해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호화로운 부채를 만든다면 대밭이 벌거숭이가 될 수밖에 없겠지요. 부채의 사치와 폐해는 이미 태종 때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였습니다. 예조에서 1ㆍ2품은 붉은 비단 원선, 3ㆍ4품은 남빛 모시 원선, 5품은 새털로 장식한 학령선, 그 이하는 장식 없는 쥘부채를 쓰는 것이 좋겠다고 했을 때 태종은 그보다 더 간소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성종ㆍ정조 때도 문제가 된 것을 보면 임금의 뜻과는 달리 화려한 부채는 계속 인기 품목이었던 듯합니다.

옛 얼레빗 (2012-05-28)


2313. 화엄사 각황전 원래 이름은 공주 손바닥에 쓰인 장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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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군 마산면 지리산 노고단 서쪽에는 천년고찰 화엄사(華嚴寺)가 있습니다. 이 절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544년(신라 진흥왕 5)에 인도에서 온 연기(緣起) 스님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670년(신라 문무왕 10)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10찰(華嚴十刹)을 불법 전파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이 화엄사를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절의 특징은 각황전에 있습니다. 대부분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국보 제67호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모십니다. 원래 이 자리엔 670년 의상대사가 이 절을 중수할 때 돌에 화엄경을 새겨 벽에 둘렀다는 장륙전(丈六殿)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륙전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를 숙종 때 계파(桂波) 선사가 다시 세웠다지요.

이에는 한 설화가 전해집니다. 화엄사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는 거지노파가 자신이 가난하여 장륙전을 불사할 돈이 없음을 한탄하고 불보살의 원력으로 왕궁에 태어나기를 빌면서 연못에 몸을 던졌는데 훗날 한쪽 손을 꼭 쥔 채 공주로 환생했습니다. 그 뒤 공주가 화엄사의 공양주 스님을 만나 손이 펴지니 손바닥에 장륙전이라고 쓰여 있었다지요. 이런 연유를 들은 숙종은 공주를 위해 장륙전을 중창할 돈을 대주고, 각황전이란 편액을 내려주기까지 했습니다. “각황전(覺皇殿)”이란 임금에게 불교 사상을 일깨워 주었다는 뜻이지요. 화엄사에는 뛰어난 가람 각황전 말고도 국보 제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같은 국보급 보물이 많습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불교의 참된 뜻을 기억하는 날이면 좋겠습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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