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3296. 일제, 경복궁을 식민통치를 위한 선전장으로 썼다

튼씩이 2016. 5. 26. 08:20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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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5. 26.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경복궁은 6년여의 공사 끝에 고종 9년(1872년) 중수되어 옛 위용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궁 경복궁은 얼마 가지 못해 일제로부터 유린당해 국권을 잃어버린 조선의 처참함을 상징하는 유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1915년)와 조선부업품공진회(1923년), 조선박람회(1929년) 때문이었지요.

경복궁 안에서의 ‘조선물산공진회’ 전에도 일제는 1907년 을지로 황금정 자리에 신축한 대동구락부에서 경성박람회를 열었습니다. 이 박람회는 일제가 생산한 상품을 조선에 선전하려는 것이었지요. 이것은 시작이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정궁 경복궁에 드디어 일제의 흉계를 펼칩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에서 식민통치를 벌인 지 5년이 되는 해인 1915년 경복궁을 짓밟고 ‘조선물산공진회’를 연 것입니다.

‘조선물산공진회’ 전시를 위해 일제는 르네상스 양식의 백색 전시관을 지었고 이 때문에 기존의 궁궐 건축물은 전근대성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전락해버립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근정전 주의의 행각을 어구와 농기구를 전시하는 농수산 분관으로 씀으로서 조선왕조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초라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공진회를 대표하는 제1호관을 근정전을 가로 막고 지은 것은 물론 공진회 입장권 도안 정면에 근정전 대신 제1호관을 자리 잡도록 해 경복궁의 주인이 더는 조선의 주인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했습니다. 박람회로 인해 조선왕조의 상징 경복궁은 대중의 볼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옛 얼레빗 (2012-05-24)



2312. 내 구멍이 더 크다, 엿치기의 추억 - 그때를 아십니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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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내 구멍이 크다!”
“아냐 내 구멍이 더 커!”“뭐야 내 것이 더 크다니까”
동무끼리 자기 엿에 난 구멍이 더 크다고 싸웁니다. 그러면 엿장수 아저씨가 심판이 되어 줍니다. “오늘도 내가 졌네! 재수 없어.” 투덜거리는 아이. 하지만, 소박한 엿치기에 동무들의 우정은 깊어집니다.

70년대만 해도 곳곳에서 벌어졌던 엿치기. 엿을 동강 낸 다음 엿 속에 난 구멍이 더 커야 이기는 놀입니다. 진 사람은 엿값을 내야만 하지요. 지금은 인사동 또는 민속행사장이나 가야만 볼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는 엿치기도 아주 중요한 놀이의 하나였죠. 그런데 엿치기를 하려면 엿값이 있어야 합니다. 용돈이 없던 아이들은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만 들리면 잽싸게 집 뒤꼍에 숨겨뒀던 떨어진 고무신짝이나 구멍 난 양은그릇을 들고 뜁니다.

예전 아이들에겐 엿치기 말고도 자치기, 못치기, 구슬치기 같은 놀이도 있었습니다. 자치기는 긴 막대기로 짧은 막대기를 쳐내는 것이고, 구슬치기는 구슬 하나를 손톱으로 튕겨서 다른 구슬을 맞추는 놀이지요.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순박한 놀이였습니다. 이러한 놀이를 되살리고 싶어도 시멘트 환경에서는 어렵습니다. 예전에 "치기"가 붙은 놀이는 마당이 있어야 하고 그 마당에는 흙이 깔렸어야 가능한 놀이였습니다.

같은 '치기' 가운데 유일하게 마당과 상관없는 게 '엿치기'지만 지금은 엿도 모두 1개 단위로 포장되어 파는 것이 많고 설사 이것으로 엿치기를 한다 해도 구멍 크기가 견주기 어려울 때 엿장수 아저씨가 심판도 서주지 않지요. 혹시 슈퍼 아저씨에게 심판을 자청한다면 아저씨는 "얘 바쁘다. 저기 가서 놀아라." 하실지도 모릅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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