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3315. 동서로 뛰어다니며 골동 서화를 수집했던 오세창

튼씩이 2016. 6. 24. 18:46

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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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6. 22.



“근래에 조선에는 전래의 진적서화(珍籍書畵)를 헐값으로 방매하며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 오세창씨 같은 고미술 애호가가 있음은 경하할 일이로다. 10수년 이래로 고래의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 남는 것이 없을 것을 개탄하여 자력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東購西買)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1,175점에 달하였는데, 그중 150점은 그림이다.”

1915년 1월 13일 치 ‘매일신보’에 ‘별견서화총(瞥見書畵叢)’이라는 제목으로 난 기사 내용입니다. 역관이었던 오세창(1864 ∼ 1953)이 동서로 뛰어다니며 골동 서화를 산 까닭은 조선왕조가 망하면서 전통문화의 가치가 땅에 떨어져 헐값으로 일본에 팔려나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지요. 전형필이 골동서화를 수집하여 1938년 간송미술관을 설립한 된 것도, 오봉빈이 1929년 조선미술관을 개설한 것도 바로 오세창의 권고와 지도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오경석에게 이어받은 골동서화 감식안과 민족정신은 그의 집뿐만 아니라 전형필, 오봉빈을 민족문화유산 지킴이로 만들어냈습니다. 또 그는 아버지와 자신이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근역서화징(槿域書徵)≫을 펴냈는데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한 사전입니다. 3ㆍ1독립선언 때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그는 진정 문족문화를 사랑한 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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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야기 355 >

나라시대 대표적인 염색품 천수국수장



나라시대(710-794)의 염직공예품으로 유명한 것 가운데 하나가 “천수국수장(天壽國繡帳)”이다. 국보로 지정된 천수국수장은 일본의 성덕태자가 622년에 죽은 뒤 명복을 빌기 위해 그의 비(妃)가 남편의 극락왕생을 염원하여 만든 것으로 성덕태자가 천수국(天壽國)에 있는 모습을 수장(繡帳, 수를 놓은 휘장)에 새긴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천수국수장의 밑그림을 그린 이들이 거의 고구려계 화가들이었다는 점이다. 7세기 무렵 고구려 출신 화가들은 일본에서 눈부신 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이는 본국의 세련된 불교미술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승려이면서 법륭사 금당벽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진 고구려 승려 담징 못지않은 인물로 꼽히는 사람이 바로 가서일(加西溢)이다. 가서일은 성덕태자가 사망하자 극락왕생을 위한 천수국수장 제작 시에 밑그림을 그리는 화가 역할을 해냈다.

이러한 사실은 천수국수장 명문(銘文)에 이름이 남아 있어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는데 당시 밑그림 작업에 참여한 화가들은 동한미현(東漢末賢), 고려가서익(高麗加西溢), 차한노가이기(叉漢奴加己利), 영자량부태구마(令者掠部秦久麻)와 같은 인물들인데 이 가운데 “고려가서일은 고구려의 가서일이란 뜻이다.

나라시대 최고 권력자인 성덕태자가 죽은 뒤 그를 위한 추모작품인 천수국수장에 고구려 출신 화가들이 대거 관여했다는 것은 당시 일본 회화에 고구려의 영향이 컸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한다.

천수국수장을 그린 때는 성덕태자 사망(622)과 대화개신(645) 사이로 보고 있으며 이것은 고구려식 벽화가 그려진 다카마츠고분(高松塚古墳)이 축조된 시기(694~710) 이후까지도 이러한 고구려식 화풍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천수국수장은 단편적인 것만이 현존하지만 아스카 시대의 염직공예, 회화, 복장, 불교신앙 등을 이해 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 일본한자는 구자체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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