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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인 2013년 7월 군산시 산북동 서흥2구 마을 가까운 도로 공사 현장에서 공룡 발자국 수십 개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에 같은 해 12월 군산시에서는 학술 용역으로 ‘군산 산북동 공룡 발자국 화석지 수습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대부분 초식 공룡 발자국이었으며 이밖에 육식 공룡과 익룡 발자국 화석도 확인했지요.
군산 산북동 공룡과 익룡 발자국 화석 산지에서는 초식 공룡 보행렬 11개과 발자국 184점, 대형 육식 공룡 보행렬 1개와 발자국 9점, 소형 육식 공룡 보행렬 8개와 발자국 27점, 익룡 발자국 26점, 보행렬이 확인되지 않는 육식 공룡 발자국 화석 36점 등 모두 280여 점이 발견됐습니다. 군산 산북동 공룡과 익룡 발자국 화석 산지는 발자국 화석의 다양성과 밀도가 높고 백악기 당시 공룡의 행동 특성과 고생태 환경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았지요.
따라서 문화재청은 2014년 6월 11일 천연기념물 제548호로 지정하였고 지정된 면적은 4,109㎡입니다. 공룡 발자국 화석으로 천연기념물 제411호 고성 덕명리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 산지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밖에 경상남도 마산 고현리, 경상남도 거제외도, 경상남도 울주 천전리, 전남 해남 우항리, 전남 화순 서유리 등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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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속풀이 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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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산타령과 서도 산타령, 그 뿌리는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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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부여에서 열렸던 내포제 시조강습회와 명인들의 발표회 이야기를 하였다. 내포제시조는 충청인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오는 노래로 창법이나 말붙임, 표현법 등이 지역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유산이라는 이야기, <내포제시조보존회>가 시조창 확산을 위해 28년째 열어오고 있는데, 이러한 행사야말로 시조의 확산과 보급의 차원을 넘어 국악계, 우리문화 예술계 전반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이야기를 했다.
시조창은 형식미, 유장미, 절제미, 장중미를 느끼게 되는 노래로 예부터 충신이나 애국지사, 지식인, 선비들이 즐겨 불러온 노래였다는 이야기, 평시조에서 지름시조, 사설시조 등 여러 종류로 확대되었고, 서울 경기지방의 경제(京制)와 지방의 향제(鄕制)로 구분되는데, 향제는 충청도의 내포제, 경상도의 영제, 전라도의 완제시조가 대표적이란 이야기, 시조창은 시류에 밀려 점점 외면을 받고 있는 가운데 충청남도는 내포제시조를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그 보존과 계승을 다 하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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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경기산타령과 서도 산타령의 발표공연 이야기를 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보존회>는 성동구 소월 아트홀에서 6월 16일 경기산타령 공연을, 그리고 6월 23일은 서도산타령 발표공연을 갖는다.
산타령에는 경기지방의 산타령과 서도지방의 산타령이 있어서 현재는 각기 전공하는 소리꾼들에 의해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50년대 전후부터 서도산타령은 경기창 전공자들에 의해 확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 확산운동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사범이 벽파 이창배 명인이다. 벽파 선생은 해방 직후부터 ‘예성사’의 소리선생, ‘구왕실아악부’ 촉탁, ‘국립국악원’ 악사, ‘청구고전성악학원’ 원장, ‘국악고등학교’와 ‘국악예술학교’교사로 출강하면서 경기와 서도의 산타령을 비롯한 경서도 소리를 지도한 사범이었다.
또한 1968년 선소리산타령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이후에도 줄곧 경기 산타령과 서도 산타령을 동시에 지속적으로 지도해 왔다. 필자도 고등학교 시절 서도놀량을 배운바 있다. 그러므로 선생의 유업을 이어받고 있는 그의 제자들이 해마다 정기 공연에 경기산타령만을 고집하지 않고, 서도산타령도 동시에 무대에 올리고 있는 모습은 어찌 보면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하는 것이라 하겠다.
100여년, 다나베라는 일본 음악인이 한국으로 음악기행을 왔었는데, 종로 3가 단성사 앞에서 선소리패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든 광경을 보면서 서울장안 사람들이 산타령을 얼마나 좋아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는 회고담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격정(激情)의 근대사는 산타령을 점차 하향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었다. 산타령 잘 불렀던 명인들이 세상을 떠났고, 서양음악의 유입 등 근대화의 물결과 또한 타 장르의 등장으로 인해 산타령 소리패의 전승은 매우 힘겹게 된 것이다. 다행히 국가가 산타령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이에 대한 보존정책을 마련해 준 것이 큰 다행이었다. 이러한 전승과정을 소홀히 했다면, 또 하나의 소중한 자산을 잃을 뻔 했던 종목이기도 하다.
경기지방에서 불러온 산타령은 연곡(連曲)형식으로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잦은산타령이 기본이고, 덧붙여 잦은방아타령이나 개고리타령을 부르기도 하였다. 서도산타령의 구성곡도 동일하나, 잦은산타령을 경발림(경사거리)으로 이름만 다르게 부르고 있다. 특히 경기산타령의 첫곡 놀량은 입타령이 많고, 장단이 들쑥날쑥하며 강약이나 호흡조절이 까다롭다.
대체적으로 경기산타령은 불규칙 리듬이 많고 서도산타령은 비교적 규칙적이란 점이 다르고, 서도는 템포가 빠르고 요성이 격렬한데 비해 경기는 비교적 느리고 매끈하다는 차이는 있다. 이처럼 경기와 서도의 산타령은 곡명도 같고, 장단형태나 선율, 일부 사설이 유사한 점에서 이들 노래가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다른 지방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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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는 경기산타령은 불규칙 리듬이 많고 비교적 느리고 매끈한 반면, 서도산타령은 규칙적이며 템포가 빠르고 요성이 격렬하다는 점을 들면서 “서도 산타령은 경기산타령의 변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북한 학자들이 서도의 사거리를 기본형이라 주장하는 것과 대조를 보이는 대목이다.
《한국가창대계》에서도 서도의 놀량 사거리와 남도의 화초사거리는 모두 서울 놀량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특히 서도의 놀량은 서울 산타령의 시조인 의택이 제자인 종대와 더불어 평양 부벽루에서 대동강을 바라보며 산타령을 불렀는데, 서도의 명창인 허덕선과 김방울이 이를 듣고 지금의 서도 놀량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진위 여부를 떠나 경기나 서도 산타령에는 우리나라 산 이름이 거의 망라되어 나온다. 산뿐이 아니라 강이나 사찰, 그리고 지역이름이 두루 두루 포함되어 나오기 때문에 사설 내용이 대체로 건전하여 학교 교육용으로 적당하다. 또한 다양한 리듬형이나 선율선, 씩씩하고 활달한 창법, 다양한 표현법 등이 특징이며 제창으로 부르는 노래여서 화합이나 협동심, 단결력도 키울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제도권 교육, 즉 유치원에서부터 초, 중등학교, 대학의 동아리, 문화원학교, 평생교육장, 군부대, 기업체 등등에서 활용이 기대되는 종목이다.
산타령이 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된 지 50여년이 되고 있다. 전문소리패들의 맥이 끊어진 이후, 왕십리패를 이끌었던 이명길의 제자, 이창배 명인과 과천의 소완준소리제를 이어받은 정득만 명인이 후진 양성에 진력한 결과, 현재는 황용주, 최창남 등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산타령을 지켜가고 있으며 박태여, 염창순, 방영기, 이건자, 최숙희 등의 전수조교와 <선소리산타령보존회> 회원들이 뜻을 모으고 힘을 다해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모두, 이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내줄 것을 제의한다.
또한 이 노래가 얼마나 신명나고 건강한 노래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참여해 보자고 평소 경서도 소리의 애호가 여러분과 이 분야의 전공자들, 그리고 본 문화신문 독자 제위께 적극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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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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