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4406호) 소치 허련의 ‘설경산수도’를 감상한다

튼씩이 2020. 8. 17. 14:25

이틀 전은 더위가 한고비로 치닫는다는 ‘말복’이었습니다. 장마가 지나고 이제 불볕더위가 한창인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1892)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를 감상해보겠습니다. 그림 앞쪽 시내가 바라다보이는 곳에는 조그마한 초가 하나가 있고 초가집 창문에는 맨 상투를 튼 한 선비가 외로이 앉아 있는 옆모습이 보입니다. 초가 뒤쪽으로는 이파리가 다 떨어진 겨울나무가 솟아 있고, 그 뒤로 그려진 산들은 눈이 쌓여 하얗게 등성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 허련(許鍊, 1809~1892)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19세기, 종이에 채색, 53 × 27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위쪽에는 “산과 시내가 조용하여 찾아오는 이 없으니, 임포의 집이 어디인지 물어나 볼까〔溪山寂寂無人到 試問林逋處士家〕”라는 화제가 있고, 다음에 ‘소치(小癡)’라는 호와 ‘허련지인(許鍊之印)’이라는 백문방인(白文方印, 그림이나 글씨를 옴폭하게 파내서 종이에 찍었을 때 글씨가 하얗게 나오는 도장)과 ‘소치(小癡)’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 글자나 그림 따위를 돋을새김으로 새겨 종이에 찍었을 때 글씨가 붉게 나오는 사각 모양의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이로써 글씨와 그림 모두 허련의 작품임을 알게 합니다.

 

이 그림에 나타나는 산들은 하얗게 눈이 쌓인 설경산수화인데, 설경이란 곧 겨울이요 사물이 모두 얼어붙은 계절이지요. 따라서 이 설경산수화는 선비가 뜻을 펼 수 없는 암울한 시대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초가 속의 선비는 하릴없이 독서를 하며 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런 뜻을 내포하는 설경산수도는 조선 초부터 말까지 많은 선비가 즐겨 그리는 그림이었습니다. 허련은 김정희, 초의선사, 권돈인 등 19세기 으뜸 문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활동하다가 48살에 진도로 귀양 간 이후 그곳에서 정착하여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경영하며, 말년까지 왕성하게 그림을 그렸고, 호남 화단의 줄기를 이루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