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4418호) 65살의 나이로 서울역 폭탄 의거, 강우규 의사

튼씩이 2020. 9. 2. 07:23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만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이는 1920년 11월 강우규 의사가 사형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 서울역 폭탄 의거의 주인공 강우규 의사

 

강우규 의사는 65살의 나이인 1919년 9월 2일 저녁 5시 남대문역(서울역)에 도착한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져 3ㆍ1만세 운동의 열기를 되살렸지만 이 일로 끝내 순국의 길을 걷게 됩니다. 강 의사는 1885년 함경남도 홍원(덕천) 출신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강제로 강탈당하자 식구들을 이끌고 북간도로 건너가, 한인촌을 건설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민족운동을 펼쳤습니다. 그 뒤 3ㆍ1만세 운동 직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그때 신임 총독이 부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러시아로부터 영국제 폭탄을 구입하여, 1919년 6월 1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8월 4일 서울에 도착했지요.

 

그리고 9월 2일을 거사 날로 잡은 강 의사는 폭탄을 명주수건에 싸서 허리춤에 차고, 사이토 총독을 환영 나온 군중 틈에 섞여 있다가 사이토가 역에서 나와 막 차에 오르려는 순간 폭탄을 던져 거사를 이룹니다. 천지를 진동하듯 터진 폭탄은 비록 사이토를 폭살시키지는 못했지만, 일제 식민통치자들과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달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강우규는 결국사형”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1920년 5월 28치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