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4417호) 친일시 뜯어내고 차례는 창호지로 가린 시집

튼씩이 2020. 9. 1. 07:30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 <사슴>의 시인 노천명은 109년 전 오늘(9월 1일) 태어났습니다. 그 노천명은 두산백과에 ‘한국의 시인’이라고 요약되어 있지만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ㆍ13ㆍ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노천명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청년들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권유하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출정하는 동생에게>, <병정> 등을 발표하고,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산하 부인대(婦人隊) 간사를 맡을 정도로 친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천명에게는 웃지 못할 일화가 따라 다닙니다. 그것은 광복 직전인 1945년 2월 25일 펴낸 시집 《창변(窓邊)》에 관한 이야기지요. 노천명은 《창변》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이 시집 끝에는 9편의 친일시가 실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광복되자 그것이 마음에 걸린 노천명은 이 시집에서 뒷부분의 친일 시 부분만을 뜯어내고 차례는 친일시 제목을 창호지로 가린 채 그대로 팔았습니다.

 

▲ 친일시는 뜯어내고 차례는 창호지로 가린 시집 노천명의 《창변(窓邊)》

 

전쟁 말기 상황에서 미처 배포하지 못하고 쌓아 놓고 있던 시집을 땅속에 묻거나 태워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기는 아까웠을까요? 친일파로 낙인찍힌 시인이 끝까지 구차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천주교 묘지에 있는 무덤 앞에 고양시에서 그의 시비 건립을 추진했으나, 시민단체들이 그의 친일 경력을 들어 이를 반대하면서 취소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