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4494호) 위대한 문장가 정철은 굶어 죽었다

튼씩이 2020. 12. 18. 07:45

“예로부터 우리나라 참된 문장은 오직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이 세 편뿐” 이는 서포 김만중이 자신의 책 《서포만필》에서 송강 정철을 평한 이야기입니다. 484년 전인 1536년 오늘(12월 18일)은 송강 정철(鄭澈, 1536~1994)이 태어난 날이지요. 정철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많은 한글 가사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들을 모아 엮은 책이 《송강가사》입니다. 임금(선조)에 대한 충정을 여인의 심경으로 표현한 <사미인곡>, <속미인곡>, 백성들을 계몽하고 교화하기 위해 지은 <훈민가> 등이 《송강가사》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 송강가사(松江歌辭)》 - 왼쪽 / 《송강가사》에 수록된 사미인곡(국립중앙도서관)

 

 

 

”정철은 그 마음이 정직하고 그 행동은 올바르며 그의 혀는 곧 직언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미움을 줄 뿐이며, 직에 임하여서는 몸이 쇠척하도록 온 힘을 다했고, 충성과 절의는 초목이라 할지라도 그의 이름을 다 아는 바이니 참으로 이른바 군계일학이며 전상의 맹호라, 만약 그를 벌한다면 이는 마치 주운을 베는 것이나 같다.” 이는 선조 임금이 정철을 평가한 말입니다. 이렇게 침이 마르게 극찬했던 선조는 파직하라는 명을 내리고, 끝내는 귀양까지 보냅니다. 그 까닭은 동서로 갈라진 정쟁이 극심했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며, 정철은 꺾일지언정 휘어질 줄 몰랐던 탓으로 타협은 고사하고 차선도 몰랐기 때문이지요.

 

 

정철은 말년에 강화로 들어가 은거했는데 당장 생계를 꾸리기도 버거운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정승 직책의 그는 워낙 청렴한 성품이라 무엇 하나 챙겨둔 것이 없었던 터였지요. “사면을 둘러보아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으니 형이 조금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예전에 여러 고을에서 보내온 것도 감히 받지 않았는데, 장차 계율을 깨뜨리게 되니, 늘그막에 대책 없이 이러는 게 못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형처럼 절친한 이에게서도 약간의 것인즉 마음 편하겠지만, 많은 것은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은거 한 달 남짓 만에 추운 겨울날 굶어 죽었습니다. 조선시대 대다수 양반이 한자만 문자로 인정하던 때, 한글로 그 많은 가사를 썼던 위대한 문장가 정철은 그렇게 삶을 마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