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유밀과(油蜜菓)와 사화봉(絲花鳳, 금실로 꽃과 봉황을 수놓은 비단)ㆍ금은저(金銀箸, 금은 젓가락)ㆍ채화초(彩花草, 비단이나 모시, 종이 따위로 만든 꽃)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 이외에는 모두 금단하게 하소서." 이는 《태조실록》 3년(1394) 6월 1일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종합 법전으로 일컬어지는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이르기를 "헌수(獻壽, 환갑잔치 따위에서, 주인공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술잔을 올림), 혼인, 제향(祭享,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 이외에 조과(造菓, 유밀과나 과자 따위)를 쓰는 사람은 곤장을 맞도록 규정한다."고 하였습니다.
토박이말로 “과즐(또는 과줄)” 곧 한과가 얼마나 유행했으면 나라에서 금하기까지 했을까요? 그런 정도였던 과즐은 인터넷에 “어릴 적에 설날이면 엄마가 과즐이란 과자를 사 오셔서먹곤 했습니다. 근데 지금은 그 과즐이란 과자를 어디서 파는지 구할 수가 없네요."라는 질문이 올라올 정도로 잊혔습니다, 요즘 과즐 대신 “한과(韓菓)”라고 하는데 이는 한복, 한식처럼 서양의 과자와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지요. “과즐”은 유밀과, 약과, 정과, 다식, 숙실과 따위를 아울러 이르는 말입니다.
이 과즐 가운데는 밤ㆍ대추 등에 꿀을 넣고 졸이거나, 이를 삶아 으깨서 꿀ㆍ계피가루에 버무려 밤, 대추모양으로 만들어 잣을 끝에 꽃은 “숙실과(율란 또는 조란이라고 부름)”도 있습니다. 몇 년 전 한 잡지에서는 “율란”을 극찬하는 외국 대사 부인의 말이 있었습니다. 외국인들이 천상의 음악이라고 한다는 “수제천”을 우리가 잘 모르는 것처럼 외국 대사의 부인이 극찬하는 우리의 과즐, 하지만 서양과자에 밀려 그 과즐은 이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갑니다.
|
|
|
|
| |
|
|
|
|
|
|
옛 얼레빗 (2012-07-12) |
|
2341. 아이스케키 욕심에 멀쩡한 고무신을-그때를 아십니까(23)
| |
|
|
|
| |
|
|
|
|
|
|
. |
|
“아~이스케키! 얼음과자!” 신나게 외치고 다니던 아이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아이들은 구슬땀을 흘리면서 골목골목을 돌았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이스케키 통을 들고나가 파는 일밖에는 없던 시절 얼음과자 장사는 한철 장사로는 그만이었지요. 그런데 날마다 잘 팔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스케키가 팔리지 않는 날 아이들은 통에 앉아 가위바위보를 합니다. 이기는 사람이 지는 쪽의 아이스케키 하나씩 먹는 내기였지요. 그러다 보면 파는 것보다는 먹어치우는 것이 더 많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 아이스케키를 사먹는 사람은 용돈이 흔했을까요? 당시 사먹는 아이들 역시 용돈이 없기에 떨어진 고무신짝이나 비료부대 그리고 구멍 난 양은 냄비 같은 것들을 주고 사먹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아이스케키 먹을 욕심에 떨어지지도 않은 고무신을 시멘트 바닥에 문질러 일부러 구멍을 내다가 아버지에게 경을 치기도 했지요.
지금이야 아이스크림은 재벌기업들이 만들지만 그때 아이스케키를 만들던 곳은 영세한 업체였습니다. 그래서 유통조직도 없기때문에 아르바이트하려는 아이들에게 판매를 의존하던 때였습니다. 또 당시 아이스케키 통은 나무판으로 만들어 안쪽에는 스치로폼을 대어 녹지 않게 했지요. 아이스케키, 군것질거리가 없던 당시에는 이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케키야말로 환상의 맛이었습니다. 아이스케키를 소리쳐 팔던 아이들 지금 무엇을 할까요?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