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14년 전인 고종 44년(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廣文社) 문회(文會) 특별회에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던 광문사의 부사장 서상돈은 모든 국민이 금연으로 돈을 모아 국채를 보상하자고 제의했고, 참석자들이 이에 찬성하면서 즉석에서 2,000여 원이 모금됐습니다. 이어 2월 21일, 대구 북후정(北堠亭)에서 대동광문회 주최로 국채보상을 위한 대구군민대회가 열려 국채보상취지서가 발표됐고, 대회에 참석한 군민들부터 성금을 모으기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며 전국 각 지역으로 번져 나갔지요
▲ 1907년 4월 12일 경향신문에 실린 국채보상론에 관한 논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이 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떠안긴 차관 1,300만 원을 온 국민의 힘을 모아 청산함으로써 경제 자립을 실현하고 나아가 국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1906년을 기준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예산 세입액은 1,318만 9,336원, 세출액은 1,395만 523원으로, 적자 상태였기에 한 해 예산과 맞먹는 거액의 국채를 대한제국 정부가 도저히 갚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모두 나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온 나라로 급속히 퍼져 각계각층의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가운데 1년 정도 지속했지요.
국채보상운동에는 노동자와 농민, 부녀자, 인력거꾼, 기생, 백정, 영세 상인, 학생, 승려 등 모든 계층이 참여했으며,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주축을 이뤘습니다. 담배를 끊어 저축하고, 비녀와 가락지, 노리개를 내놓고, 심지어 머리털을 잘라 팔기도 했는데 마침내 고종도 “국채보상의 일로 인민이 담배를 끊고 대금을 모집한다는데, 짐도 불가흡연(不可吸煙)”이라며 담배를 끊자, 여러 대신도 이를 따랐습니다. 1908년 5월말까지 보상운동으로 모은 돈은 230만 원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일제 강점 직후 모금액 전부를 경무총감부에 빼앗기면서 이 같은 계획은 수포가 되었지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 보상운동이었지만, 자발적인 시민운동으로 애국심과 항일 정신을 드높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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