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 타던 백아는 그 소리를 제대로 알아듣는 종자기가 죽고 나자 세상이 텅 빈 듯하여 이제 다 끝났다 싶어서 허리춤의 단도를 꺼내어 거문고 다섯줄을 북북 끊어버리고 거문고 판은 팍팍 뽀개 아궁이의 활활 타는 불길 속에 처넣어 버리고 이렇게 물었겠지. ‘네 속이 시원하냐?’ / ‘그렇고말고.’ / ‘울고 싶으냐?’ / ‘울고 싶고말고.’ - 신호열·김명호 옮김, 『연암집』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 한양 벗들의 안부를 묻는 편지 일부입니다. 특히 이덕무(李德懋)가 죽고 나서 백아처럼 홀로 남은 박제가(朴齊家)가 걱정이 되어 쓴 것입니다.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친한 벗이 죽었을 때 백아(중국 춘추시대 거문고 명인)의 심정 같은 박제가의 심정을 박지원은 마치 곁에서 본 듯 절묘하게 묘사합니다.
종자기는 백아가 산을 생각하며 연주하면 “좋다, 우뚝하기가 마치 태산같구나”라고 하였고, 흐르는 물을 마음에 두고 연주하면 “좋다, 도도양양하기가 마치 강물 같구나”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백아의 음악을 뼛속 깊이 이해하던 벗이 죽었을 때 어찌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판을 빠개지 않을 수 있을까요? 종자기처럼 뛰어난 연주는 못해도 남의 음악을 깊이 새겨들을 줄 아는 사람을 ‘귀명창’이라고 합니다. 음악 연주자는 곁에 자기 음악을 뼛속 깊이 사랑해주는 귀명창이 있을 때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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