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김영조)

우국지사의 정신까지 잘 묘사한 채용신의 <황현 초상>

튼씩이 2021. 10. 5. 12:56

우국지사의 정신까지 잘 묘사한 채용신의 <황현 초상>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무궁화 이 세상은 망하고 말았구나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등잔 아래 책을 덮고 옛일 곰곰 생각하니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글을 아는 사람 구실 정녕 어렵구나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매천 황현黃玹이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순국하기 직전에 남긴 절명시絶命詩입니다. 황현은 동생 황원黃瑗에게 세상 꼴이 이와 같으니 선비라면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만일 오늘 안 죽는다면 장차 반드시 날로 새록새록 들리는 소리마다 비위에 거슬려 못 견뎌서 말라빠지게 될 것이니 말라빠져서 죽느니보다는 죽음을 앞당겨 편안함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자신이 순국을 결심하고 있음을 내비쳤다고 합니다.

 

그런 황현의 초상화를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가 채용신蔡龍臣이 그렸습니다. 채용신은 특히 인물을 잘 그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최익현상崔益鉉像>, <운낭자상雲娘子像> 등 수많은 초상화를 남김 사람입니다. 그 가운데 <황현 초상>은 극세필極細筆(잔글씨를 쓰는 몹시 가는 붓)을 이용하여 육리문肉理紋(피부 결을 따라 붓을 놓는 기법)에 따라 터럭 하나까지도 다르지 않게 그린 수작 가운데 수작이지요.

 

 

 

 

 

 

그러나 초상화의 가치는 외형적으로 닮게 그리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소위 전신사조라 하여 내면세계까지도 전해줄 수 있어야 진짜 초상화입니다. 그야말로 초상 속 사람의 정신까지 전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채용신은 일제에 나라가 망하자 글배운 지식인으로서 항거의 의미로 자결을 선택한 우국지사 황현의 얼굴에 선비의 꼿꼿함과 우국정신이 살아 있는 초상화를 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