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3377. 65살의 나이로 서울역 폭탄 의거를 주도한 강우규 의사

튼씩이 2016. 9. 2. 18:23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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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9. 2.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만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이는 1920년 11월 강우규 의사가 사형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강우규 의사는 65살의 나이인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역(서울역)에 도착한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져 3ㆍ1만세 운동의 열기를 되살렸지만 이 일로 끝내 순국의 길을 걷게 됩니다. 강 의사는 1885년 함경남도 홍원(덕천) 출신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강제로 강탈당하자 식구들을 이끌고 북간도로 건너가, 한인촌을 건설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민족운동을 펼쳤습니다. 그 뒤 3ㆍ1만세 운동 직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그때 신임 총독이 부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러시아로부터 영국제 폭탄을 구입하여, 1919년 6월 1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8월 4일 서울에 도착했지요.

그리고 9월 2일을 거사 날로 잡은 강 의사는 폭탄을 명주수건에 싸서 허리춤에 차고, 사이토 총독을 환영 나온 군중 틈에 섞여 있다가 사이토가 역에서 나와 막 차에 오르려는 순간 폭탄을 던져 거사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 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의 길을 걷게 되는데 강 의사는 순국 직전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有身無國 豈無感想)”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오늘은 97년 전 65살의 나이로 구국의 최일선에 섰던 강우규 의사의 의거일입니다.

옛 얼레빗 (2012-09-05)



2373. 알렌의 유성기와 조선 선비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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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말기 주한 미국 공사 알렌은 어느 날 공관에서 연회를 열고 대신을 초대했습니다. 이때 알렌은 여흥으로 당시에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유성기를 틀어 놓았지요. 난생처음 보는 물건을 앞에 두고 조선의 대신들은 한결같이 못 본 체, 못 들은 체 했습니다.

그러자 알렌은 짧은 연설을 하고 이에 대한 한 대신의 답사를 모두 녹음하여 반시간 정도 뒤에 유성기로 다시 들려줬습니다. 알렌 생각에는 모두 놀랄 것으로 생각 했는데 대신들은 조금 전 했던 말이 그대로 재생되어 나오는데도 역시 눈만 조금 크게 뜰뿐 천장을 보거나 창밖을 보는 등 애써 태연자약하더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그랬을까요? 옛 선비들은 희비나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喜怒不形於色) 요사스러운 것은 뜻을 상하게 한다(玩物喪志)는 유교의 가르침을 금과옥조처럼 받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단지 눈물이 고였다는 것만으로도 벼슬하는 데 지장을 받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유성기를 처음보고 신기해할 대신들이 속으로는 놀랐겠지만 겉으로는 짐짓 태연한 척 했던 것입니다. 유성기 이후 크게 발달한 오디오를 비롯한 무선전화, 사진기, 노트북 따위의 문명의 이기를 당시 대신들이 보게 된다면 역시 무표정한 모습으로 대했을지 궁금합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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