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분질욕’ 네 글자를 써서 곁에 붙여둔 강석덕
강석덕은 성품이 청렴하고 강개(慷慨)하고 고매(高邁)하며, 옛 것을 좋아하였다. 과부(寡婦)가 된 어미를 섬겨서 지극히 효도했으며, 배다른 형제(兄弟)를 대우하여 그 화목을 극진히 하였다. (……)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생각할 적엔 다스리는 방법이 매우 주밀(周密)했으며, 집에 있을 때는 좌우(左右)에 책을 두고는 향(香)불을 피우고 단정히 앉았으니, 고요하고 평안하여 영예를 구함이 없었다. 손수 ‘징분질욕(懲忿窒慾)’이란 네 개의 큰 글자를 써서 좌석의 곁에 붙여두고,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세조실록』 5년(1459년) 9월 10일 기사에 나오는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강석덕(姜碩德, 1395∼1459)의 졸기(卒記)입니다. ‘졸기’란 죽은 인물에 대한 간결한 평을 담은 글이지요. 조선 초기의 유명화가 강희안(姜希顏)과 뛰어난 문인 강희맹(姜希孟) 형제의 아버지인 강석덕은 ‘징분질욕(懲忿窒慾)’ 곧 ‘분노를 참고 사욕을 억제한다’라는 좌우명을 지키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병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여러 아들에게 글을 읽게 하고는 이를 듣고 있었지요. 또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이가 60세가 되었는데, 비록 공리(功利)는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못했지마는 일을 행하는 데 권모(權謀)와 사기(詐欺)가 없었으니, 스스로 반성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의 벼슬아치들에게 이런 강석덕을 본받으라 한다면 무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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