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김영조)

50세가 넘어서야 명주옷을 입은 윤선도

튼씩이 2021. 12. 17. 18:22

50세가 넘어서야 명주옷을 입은 윤선도

 

 

나는 나이 50이 넘어서야 명주옷이나 모시옷을 처음 입었는데, 시골 있을 때 네가 명주옷을 입은 것을 보고 몹시 불쾌했다. 대체로 이 두 종류의 옷은 대부(大夫)가 입는 옷으로서 대부들도 입지 않은 이가 많은데, 더구나 평민으로서 대부의 옷을 입어서야 되겠느냐? 이런 복식(服飾)은 모름지기 물리쳐 가까이 말고 검소한 덕을 숭상하도록 하여라.

 

 

충헌공(忠憲公)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91671)가 아들에게 내려준 가훈의 일부입니다. 50세가 넘어서야 명주옷을 입었다니 그의 성품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윤선도는 오우가(五友歌)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익히 잘 알려졌으며, 정철(鄭澈), 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컫는 문인이지요.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간신배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유배되었고, 서인 우두머리 송시열에 맞섰다가 또다시 유배되었습니다. 이렇게 20년 동안의 유배생활이 이어졌지만 그는 봉림대군(鳳林大君, 훗날의 효종)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스승이 되었고, 뛰어난 글을 많이 남겼지요.

 

그의 검소한 성품은 가훈에 잘 드러납니다. “의복이나 안장이나 말() 등 몸을 치장하는 모든 구습을 버리고 폐단을 없애야 한다. 음식은 배를 채우는 것으로 족하고, 의복은 몸을 가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말은 걸음을 대신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하고 안장은 견고한 정도로 만족해야 하며, 모든 기구는 필요한 데에 알맞도록 써야 한다라며 후손들에게도 검소한 삶을 살 것을 요구했습니다. 윤선도의 위대한 점은 자신과 후손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어려운 이웃이나 심지어 집안의 노비에게조차 덕을 베풀었다는 점입니다.

 

 

대부     1품에서 종4품까지 벼슬한 이를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