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3382. 단원풍속도에 나오는 ‘배자‘, 신라 때부터 입은 옷

튼씩이 2016. 9. 9. 19:14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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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9. 9.



“더할 수 없이 검약하여 의대(衣)는 화려한 무늬 놓은 비단을 취하지 않았으므로 곤룡포(袞龍袍) 이외에는 목면(木綿)과 명주ㆍ모시뿐이었다. 근간에 무늬 놓은 비단을 자주 볼 수 있기에 몇 해 전에 무늬 있는 옥색 비단으로 배자(背子)와 허리띠 하나를 지어서 올렸더니,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고서는 한 번 입고 다시는 더 입지 않으셨다. 잠잘 때는 허름한 잠옷과 목침(木枕) 하나로 오늘날까지 지냈고, 기완(器玩, 감상하며 즐기기 위하여 모아 두는 기구나 골동품)과 습물(什物, 세간ㆍ기구)을 혹시라도 마음속에 두어본 적이 없으셨다.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위는 순조실록 1권, 명경왕비(순조 비)가 내린 행록(行錄, 언행을 기록한 글)에 있는 내용입니다. 위를 보면 명경왕비는 검소하여 배자와 허리띠를 지어서 올렸는데 좋아하지 않는다며 한 번 입고 더는 입지 않았다고 하지요. 여기서 나오는 배자(背子)는 저고리 위에 덧입는 덧옷입니다. 소매가 없고, 양옆의 귀가 겨드랑이까지 틔었으며 길이가 짧지요. 흔히 비단 따위 겉감에 토끼ㆍ너구리ㆍ양의 털이나 융으로 안을 대고 선()을 두릅니다.

배자를 입은 모습은 김홍도의 단원풍속도(檀園風俗圖) 같은 그림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소매가 없습니다만 예전에는 장(長)배자, 단(短)배자의 구별이 있어서 장배자에는 소매가 달렸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배자는 우리 겨레가 오래 전부터 입어온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 흥덕왕 때 복식금제(服飾禁制)에 보인 “배당(褙)”이 배자일 것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조끼는 근세에 서양 양복이 들어오면서 따라 들어온 것이고, 마고자는 대원군이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올 때 입고 온 청나라 옷 마괘가 변형된 옷이라고 하지요.

옛 얼레빗 (2012-09-11)



2376. 대관령, 고개가 높고 하늘이 낮아서 고개 위가 겨우 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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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 외로이 한양 길로 가는 이 마음 /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이는 고향 강릉을 떠나 서울로 가는 신사임당이 대관령을 넘으며 지은‘사친시’입니다.“고개가 하도 높고 하늘이 낮아서 고개 위가 겨우 석자”라는 말이 전해지는 대관령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예전에 눈만 오면 교통이 끊기곤 하는 험한 길이었습니다.

대관령 고갯마루는 높이가 832m인데 신라시대에는“대령(大嶺)”, 고려시대에는 “대현(大峴)”, “굴령(堀嶺)”이라 했으며, 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대관령이라는 이름이 나타나지요. 대관령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옵니다. 강릉의 한 선비가 과거 길에 오르면서 곶감 한 접(100개)을 지고 대관령을 올랐는데, 굽이 하나를 돌 때마다 곶감 하나씩을 빼먹으며 고갯길을 올랐습니다. 그런데 고갯마루에 올라보니 곶감이 달랑 한 개만 남게 되어 대관령이 아흔아홉 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지요.

이 대관령을 지나던 영동고속도로가 대관령 구간에 굴을 뚫어 직선화함으로써 기존 대관령은 자동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명승 제74호 “대관령옛길”로 남게 되었습니다. 대관령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은 그야말로 절세지경입니다. 발 아래로 펼쳐진 산줄기와 계곡이 굽이굽이 아름답고 멀리 경포호와 동해바다의 푸른 물이 유혹하는 대관령옛길을 돌아보면 어떨는지요?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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