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우리 역사 속엔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돕고 지지했던 외국인들 덕분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국가 간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그 시절, 세계 곳곳을 다니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도운 헐버트와 베델을 소개합니다.
호머 베잘렐 헐버트(1863~1949, 한국명 ‘헐벗’)는 1886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온 뒤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내한하자마자 한글의 우수성에 매료되었고, 1891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하였습니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을 도왔고, 영문판의 편집인이었습니다. 헐버트는 1905년에 고종 황제의 밀사로 미국을 방문하여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호소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파견되어 한일 협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주의를 규탄하였습니다. 이후 미국에서도 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38년을 투쟁하였습니다. 1949년,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라는 유언에 따라 헐버트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치되었습니다. 195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당시 태극장)에 추서되어 대한민국의 독립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았고, 2014년에는 한글에 관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습니다.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1872~1909, 한국명 ‘배설’)은 1904년 러일전쟁 직후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하여 강력한 항일 논조로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습니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반대를 시작으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고종이 을사늑약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친서를 게재하는 등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였습니다. 베델은 전국 각지의 항일 의병 활동을 연일 보도하여 한국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고종 또한 비밀리에 자금을 제공하며 베델을 지원하였습니다. 일본은 베델의 추방과 신문의 폐간을 영국에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베델은 상하이에서 3주일간의 금고형(징역)을 복역하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긴 베델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1968년에는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되어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기념우표의 변지에는 두 사람의 유품 및 업적과 관련된 발간물이 실려 있습니다. 〈사민필지〉와 ‘아리랑 악보’는 헐버트의 업적과 관련된 자료입니다.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와 신문사 사옥에 게양한 것으로 알려진 ‘배설 유품 태극기’에서는 베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표를 감상하며 우리의 독립을 돕기 위해 헌신했던 외국인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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