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昨冬雪如花 지난 겨울 꽃 같던 눈 今春花如雪 올 봄 눈 같은 꽃 雪花共非眞 눈도 꽃도 참(眞)이 아닌 것을 如何心欲裂 어찌하여 마음은 미어지려 하는가.
위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옥중에서 쓴 “벚꽃을 보고(見櫻花有感)”란 한시입니다. 그렇습니다. 겨울엔 눈이 꽃 같았고, 봄엔 꽃이 눈인 듯 합니다. 눈도 꽃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아닌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우리는 그 눈과 꽃에 마음을 뺏기고 미어지려 하는 것이지요. 선생 같은 위대한 선각자도 눈과 꽃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는데 하물며 중생들이야 어쩌겠습니까?
일제강점기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라고 했으며, 일제강점기 큰스님 만공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고 하지요.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서 ‘친일파’라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고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선생은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지금 한용운 선생처럼 세상을 향해 크게 꾸짖을 어른이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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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속풀이 2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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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장월중선의 맥을 이은 가야금 병창 정경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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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국립국악원에서 오랫동안 가야금 병창을 불러온 소리꾼, 정경옥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오빠는 아쟁산조의 정경호, 언니가 경상북도 판소리 예능보유자 정순임 명창이다. 이들은 어머니 장월중선(張月中仙)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가야금 병창(竝唱)이란 창자 스스로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 장르인데, 악기를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로는 꽹과리를 치면서 부르는 불교의 <화청>이나 <회심곡>, 또는 <비나리>등이 있고, 장고를 치면서 부르는 민요 등도 있으나 이러한 연주형태는 병창이라 부르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가야금병창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소리와 가야금 양 쪽이 능숙해야 되기 때문이며, 특히 가야금의 반주는 노래의 골격선율에 잔가락을 삽입하여 화려함과 탄력을 준다는 이야기, 정경옥의 가야금 병창은 발음이 분명하고 힘이 실려 있으며 상하청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면서 깊은 맛을 낸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지난 달, 무계원에서의 공연 역시, 작은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강렬함과 부드러움의 조화, 그리고 꺽고 흔들고, 밀고 흘리는 다양한 창법, 무엇보다도 버티고 앉아있는 당당함이 청중을 압도하고도 남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는데, 바탕은 그의 어머니 장월중선으로부터 물려받은 음악성, 아니 그 이전의 장판개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목구성이나 음악적 유전자가 있어서 가능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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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그의 음악적 배경은 할아버지를 통해 어머니에게 전해졌고, 다시 그 유전자는 그들 형제에게 전해진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들의 장기(長技)나 취향에 따라 판소리, 아쟁, 가야금병창 등으로 주전공 분야는 구분되었다고 해도 그들의 후천적 노력과 함께 집안 내력의 영향이나 음악적 배경이 큰 배경이었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어머니, 장월중선은 판소리를 비롯하여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장월중선은 이미 10살 이전에 큰 아버지인 장판개 명창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또한 13살 때부터는 고모인 장수향에게 풍류 가야금을 배웠으며, 오태석에게는 가야금병창 등을 배웠다.
오태석은 가야금 병창의 대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고음(高音)을 낼 때에는 남보다 더 높게 올라가고, 또한 저음(低音)은 더 내려가는, 그래서 상하청(上下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풍부한 성량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오태석은 가야금병창 분야에서는 전무후무한 명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가장 많은 음반을 낸 명창으로도 유명하다.
장월중선은 박귀희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 활동해 왔다. 그런데 장월중선은 주로 지방에서 활동해 온 탓에, 그것도 가야금 병창만을 위주로 해 온 것이 아니었기에 별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못한 반면, 박귀희는 <국악예술고>를 중심으로 중앙에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해 왔으며, 특히 국가적인 크고 작은 행사에 가야금병창으로 자주 참여해 왔고, 무엇보다도 이 분야의 국가문화재 예능 보유자로 많은 명창들을 배출해서 오늘날 가야금 병창이라는 장르를 확고하게 정착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가야금 병창에서 소리는 주로 판소리 창법이 중심이지만, 가야금의 역할은 무엇일까? 일반인들은 단순하게 노래의 선율만을 따라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 않다. 가야금 가락은 노래의 골격 선율에 다양한 시김새를 넣어 화려함과 탄력을 더해 주고 있어서 노래의 분위기를 한층 더 멋스럽게 살려주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래가 어느 부분에서 일음(一音)을 길게 뻗어 나갈 경우, 가야금은 다양한 잔가락이나 사이가락을 넣기도 한다. 특히 느린 6박의 진양 장단에서 소리는 대개 제4박에서 끝나는 악구가 많은 편인데, 이러한 경우에 나머지 제5~6박은 반주가락으로 채워주고 있어서 마치 장고 장단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노래의 악구(樂句)와 악구 사이, 1~2장단을 노래 없이 가야금의 독주선율로 채워 마치 간주(間奏)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가야금의 역할은 수성의 가락을 쫒아 단순하게 진행하는 반주의 역할이 아니라, 노래와의 2중주, 또는 3중주를 하고 있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가야금 연주 능력이 절대적이지 않으면 유능한 병창자가 되기 어렵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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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월중선은 판소리, 가야금 풍류, 가야금병창 외에 여러 종목들을 당대 최고의 명인 명창들로부터 배워서 각 종목에 두루 통달한 만능 국악인이었다. 그 가운데 박동실로부터 받은 판소리 심청가의 전수와 함께 창작 판소리 <열사가>를 최초로 배워 발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 중 그가 배운 <유관순 열사가>와 <안중근 열사가>는 그의 장녀인 정순임에게 전승해 주어 그 소리의 맥를 잇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장월중선은 임석윤, 그 뒤에는 다시 한갑득에게 거문고산조를 배웠는가 하면, 당시 정읍에 살던 정자선을 찾아가 고전무용을 배우기도 했다. 당시 정자선은 최고의 대가로 알려져 있었기에 누구든 춤을 배우려면, 특히 승무와 살풀이를 배우려면 정읍으로 와야 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다. 더욱이 장월중선은 이동안을 그가 살고 있던 목포로 모셔다가 다시 전통무용을 배울 정도로 열성적이었고, 범패의 박송암으로부터는 홋소리나 짓소리는 물론이고, 나비춤이나 법고, 바라춤, 등 불교의 음악과 춤에도 관심을 갖고 배웠던 것이다.
가야금산조는 당시 서울에 있던 김윤덕을 찾아가 배웠다. 이처럼 어느 한 분야만을 집중적으로 익힌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장르를 다양하게 섭렵했기에 장월중선은 주로《임방울 협률사》나 《국극사》, 또는《조선창극단》이나 《임춘앵 여성창극단》 등에서 활동을 했다. 창극단에서는 소리도 하고, 악기로 반주도 하고, 때로는 춤도 추어야 하는 일인다역(一人多役)의 팔방미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각 창극단에서는 장월중선 모셔가기 쟁탈전이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가 대략 8,15해방을 전후해서 6.25 전쟁 직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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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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