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하루하루가 잔치로세(김영조)

3월 15일 - 그때 종로 혜정교에 모였을 사람들은 무얼 느꼈을까요

튼씩이 2018. 3. 15. 08:10

서울 광화문우체국 북쪽에 혜정교(惠政橋)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세종 16년(1434)에 보면 오목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처음으로 혜정교와 종묘(宗廟) 앞 거리에 설치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리 위에서는 부정부패를 저지른 탐관오리를 벌주는 팽형, 곧 끓는 가마솥 속에 죄인을 넣어 삶는 공개처형을 하기도 했지요.



팽형 절차를 보면 혜정교 한 가운데에 임시로 높다란 부뚜막을 만들고,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만한 큰 가마솥을 겁니다. 솥에는 물을 붓고 아궁이에는 불을 땔 수 있도록 장작을 넣습니다. 그 앞쪽에 천막을 치고, 포도대장이 앉으면 팽형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진짜 팽형을 하는 건 아니고 죄인을 가마솥에 담고 솥뚜껑을 닫은 다음 구령에 따라 장작불을 지피는 시늉만 하고 실제로 불을 붙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솥 속에 든 죄인은 그 순간부터 살아 있는 주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꺼내 살아 있는 주검을 식구들에게 넘기면 식구들은 미리 준비해간 칠성판에 이 살아 있는 주검을 뉘여 집으로 데리고 가 격식대로 장례를 치릅니다. 이렇게 장례가 끝나면 호적이나 족보에 죽은 사람으로 오르는 것이지요. 물론 먹고사는 일은 할 수 있고 아이도 낳을 수 있지만 살아 있는 시체의 아이는 태어나도 아비 없는 사생아가 됩니다. 요샛말로 생매장하는 셈이지요. 살아 있으되 산 사람이 아닌 주검을 만드는 팽형은 부정부패를 저지른 탐관오리에게는 죽음과 같은 벌이라는 경고성 형벌이며 이로써 부정부패의 근원을 뿌리 뽑으려는 효과를 노린 형벌로 생각됩니다. 요즈음 과거 탐관오리보다 더한 사람들한테도 솜방망이 벌을 내려 국민을 실망시키는 것에 견주면 조선 시대 형벌은 상당히 의미가 있었던 듯합니다. 탐관오리가 날뛰는 세상이다 보니 혜정교의 팽형이 다시 그리워지려고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