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 방에 들어가면 윗자리와 아랫자리가 있는데 처음에는 이것을 구분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비결은 갓을 넣어둔 갓집이 걸린 쪽을 윗자리라고 생각하면 큰 실수가 없다. 조선 사람은 자기가 가진 어떤 것보다도 모자를 가장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항상 윗자리의 가장 높은 곳에 갓집을 매어두기 마련이다.”
1866년 한국에서 순교한 프랑스인 드브뤼 신부의 말입니다. 갓은 그만큼 벼슬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물건으로 쓰지 않을 때는 항상 갓집에 담아 드브뤼 신부 말처럼 잘 보관했었지요.
그러나 갓 이야기를 하니 조치원의 3대 장 부자(富者)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1932년에 나온 <동광> 35호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조치원에 노랭이 장 씨가 살았다. 당시에 통정대부중추원의관대성전직원(通政大夫中樞院議官大成殿直員)이란 벼슬직을 사서 폼 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장 부자 역시 선대부터 탕건 한번 써보는 게 한인지라 당시 돈 300원이란 거금을 주고 벼슬을 사서 동네잔치를 했다. 잔치 때는 개 한 마리 잡고 국수 몇 근 사고, 술 한 통 받아서 물 건너 이 참봉, 재 넘어 김 주사 따위 몇을 불러 배가 터지게 먹이고 치하를 받았다. 그런데 기왕 좋은 잔치를 하면서 춘궁기에 동네사람 불러 밥 한 그릇 주는 일도 없을뿐더러 제집 행랑아범에게도 술 한 잔, 국 한 그릇을 주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잔치 이튿날 장 부자네 3대, 곧 할애비, 애비, 아들은 통영갓에 감투를 쓰고 옥관자를 턱 하니 붙이고 조치원 시장으로 벼슬했네 하고 자랑 나갔는데 지나가던 개가 다 웃었다.”
3대가 의관정제하고 그 유명한 통영갓을 쓰고 뒷짐 지고 시장바닥을 걸어가는 모습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려지는군요. 그들도 집에 돌아와서는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하듯 갓집에 갓을 소중히 모셔놓았을까요? 갓집의 형태는 보통 두 가지로 하나는 뒷모습이 갓과 비슷한 형태로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추형으로 만들어진 것이 그것인데, 밑바닥은 원, 사각, 팔각, 12각형 모양이 있습니다. 어쨌든 갓집에 의식이 있다면 엉터리 양반들이 쓰던 갓은 맡아주기 싫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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