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하루하루가 잔치로세(김영조)

7월 26일 - 모정과 정자에 누우니 숨통이 트이네요

튼씩이 2018. 7. 27. 08:20



김홍도의 빨래터
 
조선 시대의 백성은 허리가 휘도록 많은 일을 해야 했고, 엄청난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 백성들도 농한기에는 모여서 놀거나 수다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이는 장소는 누구냐에 따라 달랐습니다. 여인네들은 빨래터에 모여 앉아 빨래를 두드리며, 집안일의 고단함, 지아비나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 살림 걱정 같은 힘든 세상살이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빨래터처럼 툭 터진 장소가 아니라 주로 건물에서 모였지요. 겨울에는 사랑방에 모여 앉았고, 여름엔 모정과 정자에 모였습니다. 태종 3년(1403) 8월 1일에 태종이 형인 익안대군 이방의를 문병하였는데 이때 “이방의가 부축되어 나와 꿇어 앉아서 울었다. 임금도 또한 눈물을 흘리고, 안마(鞍馬, 말에 얹는 안장)와 매〔鷹子〕를 내려주었다. 인하여 시병(侍病, 간병)하는 환자(宦者), 반인(伴人), 비복(婢僕)에게 포물(布物, 옷감)을 차등 있게 내려주고 모정(茅亭)에 올라 잔치를 베푸니, 의안대군 이화(李和), 완산군 천우(天祐), 찬성사 이저(李佇) 등이 시연(侍宴, 잔치에 함께 함)하였다. 이방의(李芳毅)가 초췌하여 힘이 없으므로 앉고 서는 것을 자유로이 하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모정(茅亭)이 나옵니다. 아마도 형인 임금에게 누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호화로운 정자를 짓지 않고 짚이나 억새 따위로 지붕을 이은 모정을 짓지 않았나 싶습니다.

 

모정은 보통 일을 많이 하는 백성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마을 들머리나 들판 한 가운데에 방이 없이 마루로만 된 작은 초가를 가리키는데 견주어 신분이 높은 양반들은 경치 좋고, 한적한 곳에 기와지붕을 얹은 정자를 짓고 모여 시를 짓거나 정담을 나누기도 했지요. 비록 신분에 따라 모이는 장소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이러한 곳들이 모두 숨통을 틔는 곳이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