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하루하루가 잔치로세(김영조)

7월 27일 - 우리말 문법을 최초로 정리한 주시경 선생

튼씩이 2018. 7. 27. 08:23

“길고 긴 나의 학해(學海, 학문의 바다) 여정에서 직접 간접으로 나의 나아갈 길을 지도해주신 스승이 적지 아니하였지마는, 그중에서 나에게 결정적 방향을 지시하였고, 따라 나의 추모의 정한을 가장 많이 자아내는 스승님은 조선 청년이 누구든지 다 잘 아는 근대 조선어학 최대의 공로자인 한힌샘 주시경 씨이다. …… 오늘날 같으면 조선어 선생도 여기저기서 구할 수 있지마는 그 당시에는 주 선생 한 분뿐이다. 커단 책보를 끼고서 조그만 오두막집을 나서면 동분서주하여 쉴 사이가 없었다. 안동 네거리에서 동으로 가야 할지 서로 가야 할지 깜빡 잊어버리고 헤매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글은 《조광》 1936년 1월호에 실린 외솔 최현배 선생의 <조선어의 은인 주시경 선생>의 일부분입니다.

 

우리가 지금처럼 한글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글의 정착을 위해 온몸을 불사른 외솔 최현배 선생의 공이 아주 큽니다. 그런 외솔 선생께서 한글을 옳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주시경 선생님의 덕이었다는 글이 윗글이지요. 한힌샘(주시경의 호, 주시경의 순한글 표기) 주시경(1876~1914) 선생은 황해도 봉산에서 아버지는 주면석(周冕錫), 어머니 전주 이 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나 작은아버지 주면진(周冕鎭)의 양자(養子)로 입양되었습니다. 11살에 서울로 올라온 뒤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웁니다.

 

때마침 순한글 신문을 제작하는 서재필이 이끄는 《독립신문》에 들어가 한글의 이론과 표기법 통일을 연구했으며 동료 직원들과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게 됩니다. 서재필이 주도하는 배재학당협성회, 독립협회에 참여했다가 서재필이 나라 밖으로 추방당하자 <독립신문>을 나오게 된 이래 과거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제국신문》 기자를 거쳐 선교사인 스크랜턴의 한국어 교사가 되지요.

 


이후 ‘주보따리’란 별명처럼 커다란 책보를 끼고 수많은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일본의 침략을 당한 처지에서 민족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언제나 한복 두루마기 차림으로 계몽운동, 국어운동, 국어연구 활동을 활발히 전개합니다. 우리말의 문법을 최초로 정립한 선생은 《국문문법》(1905), 《대한국어문법》(1906),《소리갈》(1913)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통해 우리말과 한글을 이론적으로 체계를 잡았고, 국어의 독특한 음운학적 본질을 찾아내는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오늘은 대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 39살 짧은 생을 마치신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