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에 있는 숭인원(崇仁園)은 사적 361호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아들 이진(1921~1922)이 8개월의 생을 살다간 무덤입니다. 영친왕(1897~1970)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입니다. 어머니는 귀비 엄씨(貴妃嚴氏)인데,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지요. 1907년 11살의 나이로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그해 12월 이등박문이 유학을 빌미로 일본에 잡아갑니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빼앗기면서 형인 순종이 이왕(李王)으로 폐위되자, 영친왕도 황태자에서 왕세제(王世弟)로 전락된 채 1920년 일본의 흡수정책에 따라 이미 약정한 약혼녀와 파혼하고 일본 왕족 나시모토 마사코(梨本方子, 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하게 됩니다. 1916년 8월 2일은 영친왕 이은의 비로 일본왕족 이방자 여사가 결정된 날입니다.
일제는 조선 황실의 후손을 끊어놓으려고 일본 어의에게서 불임녀라고 판정받은 마사코와 영친왕을 혼인시켰지만 1921년 8월 18일에 아들 진(晉)이 태어났습니다. 이듬해 1922년 4월 26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8개월 된 황손 진을 순종에게 보이고 혼인보고도 할 생각으로 동경에서 귀국합니다. 그러나 영친왕 부부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인 5월 11일 8개월 된 아기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아기의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고 하여 독살일 거라 했지만 일제는 배앓이로 죽었다고 공식발표를 했지요.
이에 대해 일본의 피가 절반 섞인 황손을 인정할 수 없다 해서 독살했다는 설과 일제가 황실의 손을 끊으려 독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순종은 이를 슬퍼하고 애석히 여겼고, 어린 아기지만 왕실의 전통을 깨고 특별히 왕자의 예를 갖춰 장례를 지내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8개월의 짧은 생을 살다간 어린 아기 진은 5월 17일에 할머니 명성황후의 곁 숭인원에 묻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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