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녹수 청산은 변함이 없건만
우리 인생은 나날이 변했다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위는 윤심덕(尹心悳, 1897~1926)이 부른 ‘사의 찬미’ 가사입니다. 서른 살 동갑 윤심덕과 그의 애인 김우진이 부관페리를 타고 부산으로 향하다 대한해협에 몸을 날린 것이 1926년 8월 3일의 일입니다.
다음 날 <동아일보>에는 ‘청년남녀정사’라는 큰 제목 옆에 ‘극작가와 성악가 한 떨기 꽃이 되어 세상시비 던져두고 끝없는 물나라로’라는 소제목을 달고 이들의 만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사진을 덧붙여 많은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그러면서 부관연락선에서 정사(情死)를 한 일은 이들이 처음이라는 말로 기사를 마무리하고 있지요.
1926년이면 일제의 강제 조선점령 16년째군요. 당시 국내외에서는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지하조직에서 독립운동을 하느라 한창일 텐데 인텔리라는 사람들이 정사라는 이름으로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해 고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합니다.
윤심덕은 평양에서 태어나 경성여고보(京城女高普)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조선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 도쿄음악학교에 유학해 성악을 전공했고 백만장자 김우진은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처자를 둔 몸으로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사람이라 이들에게 걸었던 기대가 더욱 컸을지 모릅니다. <한국일보> 2009년 8월 31일 고종석이 쓴 글 <윤심덕 - 대한해협에 가라앉은 사랑>은 이들의 죽음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과 그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든, 사실을 향한 충성을 위해서든,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하자. 윤심덕은 김우진의 연인이기에 앞서 조선의 첫 소프라노 가수였고, 김우진은 윤심덕의 연인이기에 앞서 1920년대의 뛰어난 표현주의 극작가였다“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논쟁을 보류하자는 이야기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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