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기도 기쁘나 실상은 웬일인지 이기고 나니 기쁨보다 알지 못할 설움만이 복받쳐 오르며 울음만 나옵니다. 남승룡과 함께 사람 없는 곳에 가서 남몰래 서로 붙들고 몇 번인가 울었습니다. 이곳의 동포들이 축하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만 앞섭니다. 우리 집이 스케이트를 살 만큼 부자였더라면 나는 아마 스케이팅 선수가 됐을지도 모른다. 달리기를 하게 된 것은 돈이 한 푼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터넷 《동아일보》 <손기정 어록>에 있는 말입니다. 1912년 8월 29일 평북 신의주에서 아버지 손의석과 어머니 김복녀의 3남으로 태어난 그는 16살에 중국 단둥(丹東)의 한 회사에 취직하여 신의주부터 단둥에 이르는 20여리 길을 날마다 달려서 출퇴근한 실력으로 1932년 신의주대표로 제2회 동아마라톤에 참가해 2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기까지 크고 작은 마라톤 대회를 휩쓸 만큼 마라톤에 천부적 소질을 보였고 마침내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로 우승을 합니다. 하지만 나라를 잃고 가슴에는 일장기를 단 채 시상대에 올라야 했으니 그 가슴이 얼마나 메었을까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을 제패하던 1936년은 일제가 조선의 얼과 뿌리를 송두리째 뿌리 뽑으려던 시기로 내선일체, 신사참배, 일본어 상용, 창씨개명 따위를 강요하던 때입니다. 손기정 선수의 우승 사진에서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이 1936년 8월 25일 오후 3시 《동아일보》 2판에 실리는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은 식민지 지배정책에 대한 정면 대결이자 항거였습니다. 훗날 일장기 말소를 주동한 이길용 기자를 가리켜 “그분은 신문 기자라기보다 독립지사 같은 인물이었다”고 손기정은 회고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손기정, 남승룡이 세계마라톤을 제패하여 민족정신이 고취되고 마라톤 열풍이 일자 일제는 교통정리를 이유로 마라톤 코스 일부를 제한하고 아울러 열광적인 응원도 허가제로 바꿨다고 <조선일보>가 1936년 10월 17일에 보도했습니다. 일제는 입만 열면 조선이 형제국(조선과 일본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정말 형제국이라면 마라톤 장려는 못할망정 훼방은 놓지 말아야 하는 게 형제국의 도리일 것입니다. 1936년 12월에 작성된 당시 일제의 정부문서 ‘쇼와 11년 집무보고’에서도 조선인들의 우승에 대한 경계심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2002년 11월 15일 0시 40분 90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손기정 옹은 평생 가슴속에 ‘조국’이란 두 글자를 새겨놓고 살다간 분입니다. 8월 9일은 그분이 마라톤에서 우승 한 날로 우리의 기억에 영원히 새겨질 것입니다.
'지난 게시판 > 하루하루가 잔치로세(김영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월 11일 - 혼천의로 하늘의 이치를 깨닫습니다 (0) | 2018.08.11 |
---|---|
8월 10일 - 원폭의 도시 나가사키 참관기에서 배웁니다 (0) | 2018.08.10 |
8월 8일 - 여름 더위 속에서 맞이하는 입추입니다 (0) | 2018.08.08 |
8월 7일 - 김유신은 죽어 산신이 되었습니다 (0) | 2018.08.07 |
8월 6일 - 세거우, 쇄루우가 내리는 칠석입니다 (0) | 2018.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