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하루하루가 잔치로세(김영조)

9월 5일 -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사건을 아시나요

튼씩이 2018. 9. 5. 14:45

1921년 12월 3일 국어학과 국어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문하생 임경재, 최두선, 이승규, 이규방, 권덕규, 장지영, 신명균을 포함한 10여 명이 휘문의숙(徽文義塾)에서 ‘조선어연구회’라는 한국 최초의 민간 학술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연구회는 1931년 1월 10일 총회에서 학회의 이름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고쳤고, 광복 후인 1949년 9월 5일 정기총회에서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학술단체인 이 조선어학회를 일제는 탄압했지요. ‘조선어학회사건’이 바로 그것인데 일제가 조선인 민족말살 정책에 따라 한글을 연구한 학자들을 민족의식을 높였다는 죄목으로 탄압, 투옥한 사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주시경 선생을 중심으로 한글연구가 확대되었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고, 사전편찬을 위한 연구로 한글맞춤법통일안, 표준어사정, 외래어표기와 같은 국어의 제반 규칙을 연구·정리하는 개가를 올렸기 때문이지요.


일제는 1941년 조선인 가운데 민족정신이 강한 사람을 사상범으로 분류하고, 그들을 탄압하려고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공표하여 민족운동이나 민족계몽운동을 하는 조선인을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학생이 기차 안에서 한국말을 하다가 조선인 경찰관 야스다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던 중, 서울에서 조선어사전이 편찬되고 있음을 알아냈지요.


결국 조선어학회 관련 학자들 33명이 검거되었고, 이들은 검거과정과 취조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재판 결과, 기소 처분된 16명 가운데 이극로가 징역 6년, 최현배는 징역 4년 등의 판결을 받고 복역했습니다. 이 중 네 명은 해방을 맞은 뒤인 8월 17일에야 출소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계 최고의 글자 한글을 이렇게 쓸 수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 목숨을 걸고 한글을 지켜냈던 조선어학회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