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하루하루가 잔치로세(김영조)

9월 3일 - 가뭄이 들면 임금은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튼씩이 2018. 9. 3. 13:13

《현종실록》 12권, 7년(1666) 9월 3일 기록을 보면 “근래에 가뭄이 극심하고 폭풍이 연이어 불어와 벼가 심하게 손상되어 결실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백성을 생각하노라면 매우 근심스럽고 애가 탄다. 가을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상규(常規)에 얽매여서는 안 되겠으니 기우제를 지내도록 하라”고 현종이 명을 내립니다.


 

예전엔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 가뭄이 들면 어느 나라건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마을 전체의 공동 행사로 기우제를 지냈지요. 또 피를 뿌려 더럽혀놓으면 그것을 씻으려고 비를 내린다는 생각으로 개를 잡아 그 피를 산봉우리에 뿌려놓기도 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가뭄이 심할 때 왕이 직접 백관을 거느리고 남교에 나와 기우제를 올렸는데, 일반에서는 시장을 옮기고, 부채질을 하거나 양산을 받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양반도 관(冠)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종실록》 1권(1399)에는 임금이 한식(寒食)이라 하여 친히 제릉(齊陵)에 제사하였는데, 제사 지낼 때 눈물을 흘렸으며 이때에 승도(僧徒)를 시켜 재궁(齋宮)을 수리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해가 바야흐로 흉년이니, 우선 이 공사를 정지하도록 하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무려 1,000여 차례나 흉년기록이 나오는데 기우제를 지냄은 물론이고 신축하던 공사를 중지하고, 온 나라에 금주령을 내렸으며 죄수들을 풀어주었습니다. 특히 임금이 나라를 잘못 다스려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라 하여, 임금은 스스로 몸을 정결히 하고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은 물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또 궁궐에서 초가로 거처를 옮겨 임금 스스로 근신하는 모습을 보였지요. 600년 종묘사직을 이끌어온 조선왕조의 최대 무기는 가뭄 같은 국가위기에 처했을 때 보이는 임금과 백성의 한마음 정신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