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건대, 신이 사명(使命)을 받들었으니, 떠나면 장차 해를 넘긴 뒤에야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국경을 넘기 전에 말미를 청하여 성묘를 하는 것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정리(情理)입니다. 신의 부모 묘소가 충청도 공주(公州)에 있는바, 도래솔이 눈에 보이는 듯 가을 서리에 감회가 일어 더더욱 슬픔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짧은 글을 갖추어 이처럼 간청하오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와 같은 구구한 사정을 살피시고 말미를 내리시어 이 지극한 정을 펴게 하여 주소서.”
《승정원일기》 고종 15년(1878), 중국사신으로 떠나기 전 심순택이 성묘를 하고 싶다는 상소를 올려 고종이 흔쾌히 윤허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도래솔이 등장하지요. 명절에 성묘하러 산소에 가보면 주위에 둥글게 소나무를 심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도래솔’이라 합니다. 도래솔을 가지런히 두른 단정한 부모님 묘소를 보고자 했던 옛 선비들의 효성이 물씬 풍기는 정경입니다.
이 도래솔은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후손들의 배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승이 휑하니 내려다보이면 조상님이 후손들 걱정에 저승으로 가지 못할까봐 이승이 안 보이도록 가린 것이지요. 죽은 사람의 영혼이 도래솔을 타고 하늘로 오른다는 말도 있으며, 도래솔을 베면 집안이 망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강홍중(姜弘重, 1577~1642)의 《동사록(東槎錄)》에도 도래솔 이야기가 나오는데 “배에 원역(員役)을 나누어 보냈으니, 역로(驛路)의 폐단을 덜기 위해서였다. 조반 후에 출발하여 달천(達川)에 이르러, 이안(利安) 외증조(外曾祖) 묘소에 가서 성묘(省墓)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천장(李天章) 부자와 이사충(李士忠) 형제와 어취양(魚就漾)도 와서 참사(叅祀)하였다. 임진왜란 이후로 향화(香火)가 끊어지고 도래솔〔丘木〕도 모두 베어 민둥산이 되었으며 수호하는 사람도 없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도래솔을 베어다 쓸 만큼 임진왜란 당시가 참혹했음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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