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하루하루가 잔치로세(김영조)

9월 22일 - 학생들에게 용돈을 주는 학교가 있었답니다

튼씩이 2018. 9. 22. 14:55

우리나라에 근대식 학교가 세워진 것은 고종 23년(1886) 9월 23일 공립 육영공원이 서울 정동에 문을 열면서부터입니다. 이후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의 사립학교를 세웠습니다. 입학 나이는 만 8~12살이었지만 실제로는 장가가서 어른이 된 14살, 심지어는 30살이나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근대적 학교 설립에는 고종의 계비 순헌황귀비의 노력이 컸다고 전해집니다. 흔히 엄상궁, 엄비로도 불리는 엄귀비는 여덟 살이 되던 해에 경복궁에 입궐하여 후에 명성황후를 모시는 시위 상궁이 되었다가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서 시해를 당한 이후 고종을 모셨습니다. 1896년 고종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있을 때 고종을 섬기다 비가 된 여성입니다.


 

엄비는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여성들을 계몽하자는 입장에서 몸소 한국여성 교육마당을 창설한 민족사학 선구자입니다. 구한말 외국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근대 여학교를 설립할 때 1906년 4월에 진명여학교를, 5윌에는 숙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를 창설하고 이어 양정의숙을 설립하게 됩니다. 학교 재정을 위해 친정 조카 엄익주의 함평 땅 40만 평과 자신의 개성 논 33만 평 등을 팔아 재단을 만든 일을 두고 당시 궁중에서는 도량이 넓고 두뇌가 명석하며 성품이 활달한 여걸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만든 학교지만 초기에는 학생들이 모이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학생들에게 매달 6원씩 생활비를 주었고, 점심값과 담뱃값으로 날마다 6전씩 주어 매달 3~4원씩은 저금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모이지 않은 까닭은 서양 사람이 어린애를 잡아다 눈알을 뽑아서 사진기를 만든다든지, 천연두 예방접종을 소젖으로 해야 하는데 소젖이 없어서 여자를 잡아다 젖을 뽑는다는 해괴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입니다. 초창기 학교들에는 이러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