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데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놓고 울들 못한다.
위 시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잘 알려진 김영랑(1903~1950) 시인의 시 ‘거문고’입니다. 암울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비판적 어조와 비유를 통해 자신의 처지와 정서를 상징적으로 제시합니다. 또 국권상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담겨 있는 듯합니다. 김영랑 시인은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하며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을 듣습니다.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을 발표했지요.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태어났는데 3·1만세운동 때에는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여섯 달 동안 옥고를 치렀고,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많은 시인이 친일시를 발표하고 적극적으로 창씨개명을 한 반면 서정시인 김영랑은 민족정신으로 무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시인이 저세상으로 떠난 날 그의 시 ‘거문고’를 한 번 더 읊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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