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하루하루가 잔치로세(김영조)

10월 22일 - 40년 정승살이에 남은 것은 비바람 피할 초가 두 칸입니다

튼씩이 2018. 10. 22. 11:06

"알았다. 40년 동안 정승 노릇을 하였는데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짜리 초가에 살다니 그의 청렴결백함과 안빈낙도함은 옛날에도 없던 일이다. 내가 평소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이 공덕(功德)이 있어서일 뿐만이 아니다. 이 공(李公)의 청렴과 검소를 백관(百官)이 본받는다면 어찌 민생(民生)이 곤궁해질 염려가 있겠는가. 나이가 많은 원로는 도리상 우대해야 하며 그 검소한 덕도 표창해서 나타내지 않을 수 없다. 해도로 하여금 정당(正堂)을 지어주도록 하고 또 호부(戶部)로 하여금 무명 이불과 명주 요를 사급하도록 함으로써 그가 숭상하는 바를 이루게 하라"


이는 《승정원일기》 인조 9년 (1631)에 강홍중이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병세를 임금에게 보고한 자리에서 인조가 내린 명령이었습니다. 강홍중은 보고합니다. "거처하고 있는 집은 잡목으로 얽어 만든 두 칸 초가집으로서 겨우 몸을 붙이고 살 정도인데 낮고 좁아 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그 앞에 가족들이 거처하는 곳은 더욱 기울고 누추하며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여 거의 사람이 견디고 살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또 들으니, 살고 있는 땅도 여러 대 선산 아래라서 곁에 한 뙈기의 밭도 없고 또한 딸린 종도 없이 온 가족이 단지 달마다 주는 쌀로 겨우 연명한다고 합니다."


40년 정승살이치고는 너무나 하잘것없는 집에서 병치레를 하는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원익, 그는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철저한 안빈낙도를 실천하여 그 속에서 기쁨을 찾은 보기 드문 조선의 청백리로 알려졌지요. 오리(梧里) 이원익 선생의 후손들이 만든 충현박물관(경기도 광명시)에서는 해마다 9~10월에 이원익 선생과 관련한 특별기획전을 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