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을 그린 ‘창의토왜도’
"옛날 임진란에 힘써 싸워 적을 깨뜨려 일세를 크게 울린 이로 해전에서는 이순신의 한산대첩이, 육전에서는 권율의 행주대첩이, 이정암의 연안 대첩이 있어, 역사가가 그것을 기록하였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칭송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지위가 있어 말과 부역과 군졸들을 낼 수 있음에 힘입은 것이다. 고단하고 미약한 데서 일어나 도망하여 숨은 무리를 분발시켜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여 마침내 오합지졸을 써서 완전한 승첩을 거두어 한쪽을 수복함과 같은 이는 관북의 군사가 제일이다"
위는 정문부 장군의 공덕을 기린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중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권율 같은 장수는 정식 관직을 갖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정문부 장군은 오합지졸 같은 의병 3,000으로 왜군 2만 8,000명을 물리친 것입니다. 조선의 선비가 일본의 사무라이를 물리친 정말 기적 같은 승리지요. 북관대첩비는 이 승리를 기념하여 숙종 34년(1707)에 길주군(현재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세운 전승기념비로,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에 1,500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길주군에 세워져 있던 이 북관대첩비는 러일전쟁(1904~1905년) 당시 일본군 육군소장 이케다 마사스케(池田正介)가 강제로 ‘약탈’해 가 일본 군국주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뒤쪽에 내박쳐놓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곳에 있는 동안 일제는 1톤이나 되는 돌덩어리를 얹어놓아 대첩비의 기를 눌렀습니다.
이 북관대첩비는 많이 이들의 노력으로 지난 2005년 10월 21일 무려 100년 만에 되찾아왔고, 여기에 잃어버린 머릿돌을 복원해 2006년 3.1절에 북한으로 돌려줬지요. 북한은 복원된 북관대첩비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보유적 193호’로 등록하고는, 김책시 인민위원회 이름으로 북관대첩비를 설명하는 표지석과 안내석을 나란히 세워 단장했습니다. 아무런 관직도 없이 몸 바쳐 왜군과 싸운 정문부 장군의 나라사랑 정신을 새긴 북관대첩비가 귀환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 밖에도 수없이 약탈된 문화재 역시 어서 빨리 찾아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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