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 놈들 남의 나라 삼키더니
그 자식들 통학하며
싸가지 없이
조선인 여학생 댕기를 잡아 당겼것다
아야야야 아야야야
그 광경 보다 못해 조선 남학생들
왜놈 학생 멱살 잡고 한 대 날렸것다 ……
어린 학생 잡아다가 고문하던
왜놈 순사들
머리채 잡아끈 후쿠다(福田修三)는 놔두고
힘없는 나주의 딸 이광춘만
머리끄댕이 잡히고도 퇴학당했다지 ……
- 이윤옥, <서간도에 들꽃피다> -
사건은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 통학열차에서 내려 개찰구를 빠저 나가던 한국인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일본인 남학생이 잡아당기며 희롱한 데서 시작합니다. 이 광경을 보다 못한 조선 남학생들이 뛰어들어 난투극이 벌어졌고 이것이 3·1만세운동, 6·10만세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으로 꼽히는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이날 일본인 남학생에게 희롱당한 댕기머리 소녀들의 이름은 박기옥, 이광춘, 암성금자였는데 그 가운데 이광춘은 광주여고보(전남여고 전신) 5학년으로 ‘소녀회’의 핵심 구성원이었습니다.
이후 11월 3일 대항일 학생운동이 전개됩니다. 당시 11월 3일에는 몇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지요. 일본으로서는 4대절의 하나인 명치절이었고, 우리 겨레로서는 마침 음력 10월 3일로 개천절이었으며, 광주 학생 독서회원들에게는 전신인 성진회 창립 세 돌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날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 뒤에 있을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로 하였고 이 결의는 길거리 투쟁으로까지 번집니다. 그리하여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39명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한 명이 구속되었지요.
이에 이광춘을 비롯한 친구들은 백지시험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11월 13일 시험 당일, 급우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자 이광춘은 “어저께 헌 약속 어떻게 된 거냐? 친구들은 감옥에 있는디 우리만 시험을 볼 것이냐”라고 하면서 시험지를 놔두고 교실을 뛰쳐나왔습니다. 이에 동조한 친구들과 전교생이 삽시간에 뛰쳐나와 학교가 발칵 뒤집혔지요. 급기야 거족적 학생운동으로 번져 194개 학교에서 5만 4,000여 명이 민족 차별과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를 요구했고 만주, 중국, 일본의 동포도 호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광춘 여사는 퇴학 처리되었습니다만, 그는 이후로도 5남 3녀 자녀들에게 일제의 민족차별에 맞선 불굴의 정신을 잃지 말라고 일평생 가르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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