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4173호) 고종 청나라에 영선사, 일본에 수신사 보내

튼씩이 2019. 9. 26. 08:02

조선 말기 즈음 청나라는 양무운동(1861~1894), 일본은 명치유신(1853~1877)을 펼치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동안 조선은 무엇을 했을까요? 대부분 사람들은 이때 문을 꽁꽁 닫아놓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탓에 근대화의 기회를 놓쳤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나름 고종 때 청나라에는 ‘영선사(領選使)’를 보내고, 일본에는 수신사(修信使)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보내는 등 노력을 한 흔적은 있습니다.

 



1883년 미국에 파견된 정사 민영익(1860-1914)을 중심으로 한 보빙사 일행


▲ 1883년 미국에 파견된 정사 민영익(1860-1914)을 중심으로 한 보빙사 일행

 


사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 친정체제가 되자 고종과 온건개화파의 관심은 신무기를 비롯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있었지요. 1879년(고종 16) 8월 영중추부사 이유원이 청나라로 가는 사신 편에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신식 무기의 학습 내지 수입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이에 무기제조법을 배우고 군사훈련도 가능하다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고종이 유학생 파견을 서두르자 일부 대신들이 "도리어 오랑캐를 불러들이는 매개가 된다."는 반대상소를 올렸으며, 일본도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고종은 청ㆍ일 사이에 중립형평안을 써서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중국에 영선사를 파견하여 근대문물을 고루 받아들이기로 했지요. 특히 청나라로 가는 영선사는 1881년 9월 26일 화약ㆍ탄약 제조법, 기계조작법 등 근대적 군사지식뿐 아니라 자연과학ㆍ외국어 등을 학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의 재정지원이 충분치 않았음은 물론 임오군란까지 일어나 유야무야 해진 것은 참으로 아쉬운 결과가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