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3도 유생들이 조약 철회를 상소하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썼으며, 참정ㆍ외무대신을 지낸 민영환ㆍ원임의정대신 조병세ㆍ 이조참판을 지낸 홍만식 등은 자결했지요. 이렇게 민심이 가마솥 끓듯 펄펄 끓을 때 청년장교 신규식(申圭植, 1879.1.13. ~ 1922.9.25)은 지방군대와 연계, 대일(對日)항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신 신규식은 계동ㆍ가회동ㆍ운니동 등의 솟을 대문들을 골라 몽둥이로 후려치며 미친 듯 소리 질렀습니다. “을사오적들은 나오너라!”
그러나 자신이 한낱 미약한 존재였음을 확인했을 뿐이었고 이에 음독자살을 하려했으나 문을 부수고 들어온 가족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때의 독약 후유증으로 애꾸가 되었는데 거울을 들여다 본 신규식은 냉소를 지으며, “애꾸, 그렇다. 이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보기로 하자. 어찌 나 한 사람만의 상처이겠는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상징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청년 신규식은 흘겨볼 예(睨)자, 볼 관(觀)자, ‘예관(睨觀)’으로 호를 지어 죽을 때까지 사용했습니다.
이후 경술국치(國恥) 뒤인 1911년 상하이로 망명, 운명할 때까지 신규식은 12년여 동안 큰 업적을 남겼지요. 그 업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는 당시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두 가지 운동노선을 접목시켰고, 둘째는 3․1독립운동과 상해임정 세움의 주춧돌 역할을 했던 점입니다. 언론인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 분인 오세창은 ‘3․1운동은 예관에 의해 점화되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렇게 큰 업적을 이룬 선생은 1922년 9월 25일 나라안팎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는 조선인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을 통탄하면서 25일 동안 곡기를 끊은 뒤 숨을 거두었습니다. 정부는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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